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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매직이니 뭐니 해도 날이 하직은 후끈하기에,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고 생각했다. 처서쯤 되면 매년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8월 말에 가까운 날짜이고, 그런 거라면 아닌 게 아니라 슬슬 더위가 아 올해도 잘 놀았다 하고 판을 접고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할 때가 아니던지. 뭐 그러니까, 좀 있으면 더위도 좀 수그러들겠지 하는 그런 생각을 분명히 하긴 했다.
나름 바쁜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점심을 차리느라 가스레인지 앞을 왔다 갔다 하고 설거지를 하고 난 후에는 너무 더워서 도저히 에어컨 없이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은 순간이 내내 있었다. 그래서 대개 점심을 먹고 한숨 돌리고 난 후로는 에어컨 타임이었다. 그런데 정확히 나흘 전부터 어라 이것 봐라 오늘은 에어컨까지는 안 켜도 될 것 같은데 하는 감이 오기 시작해서 그날은 슬그머니 에어컨을 생략하고 선풍기로 하루를 버텨 봤다. 그리고 버텨졌다. 그렇게 하루를 지내보니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중간중간 훅 더워지는 순간만 잘 넘기면 열어놓은 창문과 선풍기 정도로 큰 불쾌감 없이 선방이 가능했다. 그래서 별 일이 없으면 오늘도 그런 식으로, 에어컨 없이 선풍기만으로 하루를 버텨볼 생각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에어컨의 올해 근무는 이쯤에서 종료를 시켜줬으면 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7월이 가고 8월이 오도록, 그래서 올해도 3분의 2가 갔느니 마느니 하는 말을 들을 때까지도 별로 실감을 못하고 있었는데 정말 올해도 반환점을 돈 것으로 모자라 꽤 많이 결승지점에 가까워졌구나 하는 생각이 훅 들어서 순간 뜨끔해졌다. 올 한 해 내가 해결해야 할 일들 중에 몇 가지나 해결되었는지, 혹은 남은 올해 안에 해결될 여지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지만 아무래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지 않을까도 싶다. 도대체 뭘 했다고 올 한 해도 다 갔나 그래. 창밖으로 펼쳐진 놀랄 만큼 쾌청한 하늘과 구름같이 떠 있는 뭉게구름을 보며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가 늘 하던 말대로 요즘 우리나라는 봄 한 달 가을이 한 달 나머지는 다섯 달이 여름 다섯 달이 겨울이다. 그러니 이제 좀 선선해졌나 하고 조금만 옷장정리를 미적거리면 금세 한파가 들이닥쳐 비명을 지르며 옷장 깊은 곳에 구겨 넣어둔 패딩을 끄집어내야 할 시기가 올 것이다. 이렇게 더워서 차라리 겨울이 낫다고 징징대던 것 따위는 싹 잊어버리고 차라리 여름이 낫지 이렇게 추워서야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며 투덜거리게 될 날도 곧 올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오늘로 에어컨이 개점휴업에 들어간 지 나흘 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