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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흔한 해외여행을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야말로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가까운 일본이나 동남아 정도는 운만 좋으면 국내 여행보다도 적은 돈으로도 충분히 다녀올 수 있다는 모양이지만 이래저래 이 나이를 먹도록 제주도 가느라 비행기 몇 번 타본 것 외에는 비행기와는 딱히 인연이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가끔 분데스리가 중계를 보다가 도르트문트의 홈구장 지그날 이두나 파크의 장관에 탄성을 내지를 때가 있었다. 유난히 관중석 경사가 깎아지른 듯 가파른 그 구장의 한쪽 면을 가득 챠운 팬들이 구단의 상징색인 노랑과 검정 색지를 들고 하는 카드섹션은 보기에 따라서는 놀랍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했다. 죽기 전에 저런 거 한 번 직관할 수 있을까 하는 말을 하면 그는 아주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렇게 말하곤 했다. 가면 되지, 뭐가 걱정이냐고. 늘 그런 식이었다. 북유럽에 오로라를 보러 가는 프로그램을 볼 때도,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자금성으로 여행 가는 프로그램을 볼 때도, 나로서는 이름도 처음 듣는 크로아티아 어느 해변에 있다는 바다 오르간을 볼 때도 딱히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도 저런 데 한 번 가봤으면 하고 넋을 놓고 중얼거리고 있으면 그는 늘 말하곤 했다. 새털같이 많은 날에, 가면 되지 뭐가 걱정이냐고.
지인 한 분이 무난 슴슴하게 재미있는 웹툰이 있다며 시간 날 때 보시라고 권해준 작품이 있다. 아유 나는 옛날 사람이라 만화는 책으로 봐야지 모니터로는 영 안 봐지더라는 말에 그분은 나도 그런 편이지만 일본으로 여행 가서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를 짧은 호흡으로 그린 웹툰이어서 별 무리는 없을 거라고 하셨다. 몇 편 읽어보니 아닌 게 아니라 그래서, 잘 아껴두었다가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이상 가야 하는 그의 봉안당 갈 때 아껴둔 초콜릿을 한 알씩 꺼내먹듯 조금씩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린다. 참, 그런 식으로 언젠가 가면 된다고 접어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는데. 그리고 정말로, 지금이 아니라 언젠가는 갈 수 있을 줄만 알았는데. 이런저런 일에 발목이 잡혀 마음이 잘 먹어지지 않을 뿐, 마음만 먹으면 그깟 여행 따위 언제든 어떻게든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게 지금 당장 로또 1등에 맞은 복권 한 장이 하늘에서 떨어져 수십 억의 돈을 갖게 된다고 해도, 그래서 지금 내 앞에 산적한 문제의 대부분(심지어 전부 다는 아니다)을 감쪽같이 해결하고도 많은 돈이 남는다고 해도, 그 돈으로 과연 나 혼자 지그날 이두나 파크에 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조금 씁쓸해졌다.
뭐든, 하고 싶을 때 해야 한다. 갈 수 있을 때 가야 하고 먹고 싶을 때 먹어야 하며 보고 싶을 때 봐야 하고 말하고 싶을 때 말해야 한다. 다음이라니. 언젠가라니. 그런 건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진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