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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에도 곰팡이는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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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3요즘도 나는 일과 중에 30분 정도 짬을 내어 펜글씨 연습을 한다. 그가 떠나던 그 해 5월에 시작했으니 이제 2년 정도를 쓴 셈이지만 솔직히 글씨가 교정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가끔 손글씨를 쓸 일이 생겨서 써보면 뭐 그렇게까지 글씨가 나아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글씨를 쓰는 템포랄지, 마음가짐이랄지, 이런 것에서 서두르거나 흘려 써버리지 않는 점은 분명히 일정 부분 교정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펜글씨 연습을 할 때 쓰는 만년필은 총 세 자루이고 이 세 자루에는 각기 다른 색깔의 잉크가 들어 있다. 그중 한 자루는 처음에 쓰던 올리브색 잉크를 다 쓰고 얼마 전 단풍 색이 나는 주황색 잉크로 바꿨다. 컨버터의 잉크가 거의 다 되어가기에 잉크를 새로 채우려고 잉크병을 열었다가, 나는 잉크 표면에 뭔가 불길한 막 같은 것이 떠있는 것을 발견했다. 면봉으로 건져내고 잉크를 채워 넣긴 했지만 찜찜한 마음은 내내 가시지 않았다. 아니, 뭐 먹는 것도 아니고 만년필 잉크에도 곰팡이가 생기나? 인터넷에 검색해 본 결과 만년필 잉크는 유기물이 아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곰팡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제조사의 답변이 올라와 있었고, 그러나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잉크병에 핀 곰팡이 때문에 잉크를 버린 경험담을 털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절충안 비슷하게 곰팡이일 수도 있고 염료 뭉침일 수도 있다는 글도 올라와 있었다.


내심 염료 뭉침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일단 사용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잉크여서 얼마 써보지도 못했는데 어디다 부주의로 쏟은 것도 아니고 곰팡이가 피어서 버리다니. 너무 아까웠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다른 일을 하다가도 문득 잉크병이 눈에 띄면 괜히 한 번 열어보고, 유리병의 포면에 포자가 발생한 흔적이 없는지를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 버릇이 생겼다. 제발 그냥 적당한 염료 뭉침 정도로 지나가 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러나 일은 뭐 그렇게 되진 않았다. 어제 다시 잉크를 보충하려고 잉크병을 열었다가 나는 저번과 거의 비슷하지만 조금 더 기세가 살벌해진 막이 거의 비슷한 위치에 또 떠있는 것을 발견했다. 면봉을 동원해 건져냈더니 알 수 없는 덩어리 비슷한 것이 한참을 딸려 올라오는 것을 보고 탄식했다. 곰팡이 맞구나. 어쩔 수 없었다. 곰팡이가 슨 잉크는 점성이 높아져서 만년필의 피드를 막아 만년필을 못쓰게 만들기 때문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나는 만년필에 들어있던 잉크를 빼내고 세척액을 따라 만년필을 세척했다.


조금 더 찾아본 바로는 만년필 잉크에는 본래 곰팡이가 피지 않는 것이 정상이지만 병뚜껑이 잘 닫히지 않았거나 펜촉이 병에 들어가면서 곰팡이 포자가 섞여 들어가 곰팡이가 피는 일이 종종 발생하며 황색 계통의 잉크에서 그런 일이 특히 잘 일어난다고 한다. 절반은커녕 5분의 1 정도는 썼나 싶은 남은 잉크가 몹시 아깝지만 이건 버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단풍 색깔이고 가을 색깔이라 마음에 드는 잉크였는데. 실제의 가을이 그러하듯 가을색 잉크도 이렇게 훌쩍 떠나버린 걸 생각하니 영 씁쓸하다. 원래 떠나는 것들은 이런 식으로, 별다른 예고도 없이 훌쩍 떠나가게 마련인 모양이다.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온 것으로 본문의 내용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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