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낙엽색 아니고, 단풍색

-286

by 문득

며칠 전에 곰팡이가 피어 버려야 하게 생긴 잉크 이야기를 썼는데, 그 글이 무색하게도 그 잉크를 버리지는 못했다. 나의 아주 좋지 않은 습관 중의 하나인 뭔가를 버릴 때는 필요 이상으로 미적거리는 버릇이 또 발동한 것이다. 며칠째 날마다 잉크를 열어보고 있지만 아무 이상징후가 없어서, 정말로 단순한 염료 뭉침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을 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솔직하겠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그 잉크를 만년필에 다시 넣어서 쓰는 것은 몹시 꺼려졌다. 곰팡이가 핀 것을 발견하기 얼마 전부터 만년필의 잉크 흐름이 눈에 띄게 나빠져서(아마도 잉크의 점성이 높아진 탓이리라 생각하고 있다) 컨버터에 잉크가 꽤 많이 들어있는데도 자꾸만 글씨가 뚝뚝 끊어지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때 이르게 새 잉크를 하나 구입하게 되었다.


이 만년필에 쓰던 잉크는 처음엔 올리브색이었고 이번에 곰팡이가 핀 것은 이름은 브라운인데 실제로 나오는 색깔은 주황색에 가까웠다. 그래서 새로 사는 잉크도 비슷한 계열로 주문하고자 갈색 계통의 다른 브랜드 잉크를 하나 봐 두었다. 그러나 막상 결제를 할 때가 되니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만년필 잉크에는 원칙적으로 곰팡이가 생기지 않지만 황색 게통 잉크의 경우에는 더러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던 인터넷에서 읽은 글의 내용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서였다. 이번에 산 잉크에서마저 이런 꼴을 또 본다면 산이 들어 있어 곰팡이가 안 생긴다는 검정이나 청색 계통의 잉크 말고는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기껏 봐 두었던 갈색 잉크 대신 암적색에 가까운 빨간색 잉크를 주문했다. 미워하는 사람의 이름을 빨간 볼펜으로 적으면 빨리 죽는다는 저주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 또한 그 탓인지 빨간색 계통의 잉크에는 웬만하면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곰팡이 때문에 받은 충격이 내심 컸던지 좀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기도 했다.


그렇게 받은 잉크는 생각보다 그리 쨍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은 붉은색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곱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가을 단풍 색깔이라고나 하면 될까. 그러고 보니 앞에 쓰던 주황색 잉크를 두고도 단풍 색깔이라는 표현을 썼던 기억이 나는데, 그러니까 앞전 잉크는 낙엽 색깔이고 이번 잉크는 단풍 색깔이라고 정정하는 게 옳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침저녁으로 날이 많이 선선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여름의 끝자락인데 나는 혼자 벌써 이렇게 가을색 물씬 나는 잉크를 두 벙째 소비하며 오지도 않은 가을에 대한 설레발을 치고 있다. 뭐 그것도 이맘때만 칠 수 있는 설레발인지도 모르지만.


A0002697110_T.jpg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운전이나 배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