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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보는 것은 대개가 그의 담당이었지만 내가 따로 사야 하는 품목이 몇 가지 있었다. 쌀도 그중 하나였다. 마트에서 사는 쌀은 의외로 가격이 별로 싸지 않았고 늘 보던 비슷한 종류밖에 없었다. 반면 인터넷으로 나오면 종류도 다양했고 가격도 마트에서 사는 것보다 조금 쌌으며 잘 고르면 잡곡이나 병아리콩 같은 섞어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덤으로 주는 곳들도 많았다. 그래서 쌀이 슬슬 바닥을 보인다 싶으면 미리 쌀을 골라 주문해 놓는 일은 언제나 내 담당이었다.
우리는 한 달에 쌀 10Kg 정도를 먹었다. 며칠 빨리 떨어지기도 했고 며칠 더 먹는 일도 있었지만 대충 평균적으로 그랬다. 3월 말인지 4월 초인지에도 우리는 쌀을 샀었다. 쌀 포장지답지 않게 오리 캐릭터가 그려진 포장지가 귀여워서 샀던 기억이 있다. 포장지만 보고 산 쌀이었지만 밥맛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서 다음에도 이 쌀을 사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음식 맛에 까다로운 것과는 사뭇 다르게 그는 밥맛에 둔했다. 그래서 새로 산 쌀로 한 밥을 처음으로 먹어보는 날 이 쌀이 좋다 궂다를 판가름하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다른 건 안 그런 사람이 이상하게 밥맛은 못 본다고, 그날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아니, 했었을 것이다. 그건 우리의 연례행사였으니까.
원래대로라면 4월 말쯤엔 다 먹어 없앴을 그 쌀은, 그와의 갑작스러운 이별로 두 달을 넘게 더 먹고 얼마 전에야 떨어졌다.
그가 떠난 후에도 나는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다. 그럼으로 인해 하나씩 다 쓰고 다른 것을 사는 물건들도 늘어나고 있다. 소셜커머스에 핫딜로 나온 걸 보고 사서 재 놓았던 생수도 다 먹었다. 그와 함께 쓰던 바디워시도, 치약도 다 쓰고 지금은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그 외에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작고 소소한 것들이 하나씩 다른 것으로 바뀌었고 앞으로도 바뀔 것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먹던 쌀을 다 먹고 새 쌀을 사야 한다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다른 물건들을 다 쓰고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과는 조금 다른 먹먹함이 있었다. 시간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실감 났다고 해야 할까.
쌀은 큰 포장을 살수록 단가가 줄어드는 대표적인 물건이다. 1Kg 두 봉지를 살 돈이면 4Kg을 살 수 있고 4Kg 세 봉지를 살 돈이면 20Kg을 살 수 있다. 그러니 이번에도 10Kg 정도를 주문해야 경제적으로 옳은 선택이었겠지만 나는 그냥 4Kg짜리 봉지 하나를 주문했다. 아주 정확하진 않지만 그 정도면 나 혼자서는 충분히 한 달 정도는 먹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몇 번째 새 쌀을 살 때쯤이면 원래는 한 달에 10Kg 정도는 먹었었는데 하는 생각에 서글퍼지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그는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남겨놓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