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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화가 많아졌다. 예전엔 눈살 한 번 찌푸리고 넘어가던 정도의 일에 나 자신이 깜짝 놀랄 만큼 화를 내놓고 돌아서서 당황하곤 한다. 따지고 보면 화뿐만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감정의 기복이 심해졌다. 조금 전까지는 아무렇지 않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거나, 한참을 울다가 또 갑작스럽게 멀쩡해졌다가 하는 일이 잦다. 그러려니 했었다. 어떻게 지금 내가 멀쩡할 수가 있겠느냐고. 이런 일을 겪고도 멀쩡하다면 그거야말로 멀쩡하지 못한 게 아니겠냐고. 그러나 시간이 한 달 두 달 가기 시작하자 나는 내가 영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고장 나 버린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슬슬 하게 되었다.
매주 월요일 뵙는 상담사 선생님께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다면적 인성검사(MMPI)를 한 번 진행해 보자고 권해 주셨다. 나는 질문지 한 권을 받아 집으로 가져왔다. 문항은 500개쯤 됐고, 나는 그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느라 잠시 한동안 밀쳐두었던 내 속을 좀 들여다 봐야만 했다. 개중엔 항목을 보자마자 답이 나오는 것들도 있었지만 가끔은 주어진 보기 중에 답이 없기도 했고 가끔은 모두가 답이기도 했다. 그 질문지 하나에 모두 대답하는 데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그리고 어제, 그 결과가 나왔다.
선생님은 생전 처음 보는 약어들로 가득한 그래프를 하나 보여주셨다. 그리고 점수가 30점에서 65점 내의 범주에 들어가면 대개 정상의 범주라고 보며, 그보다 못 미치거나 65를 넘어서는 수치를 소위 '정상인'의 반응과 다른, 주의를 요하는 수치로 판단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내 그래프는, 그래도 꽤 대견하게 대부분의 수치가 30에서 65 사이에 분포하고 있었다. 물론 가슴 아픈 일이 있고 난 직후가 아니라 시간이 조금 지나서 한 검사이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직후에 했다면 아마 지금하고는 결괏값이 많이 달랐겠지요. 그렇다고는 해도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어요. 정말로 많이 애쓰고 노력하고 계신다는 증거겠지요. 제가 다 감사할 정도입니다. 그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하루하루 버텨내느라 급급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그간 내가 꽤 많이 애를 쓰고 있었구나 하는 사실에 대해서. 다만 약간 걱정스러운 부분은 현재 부정적 정서와 우울감, 고립감 수치가 정상 범주를 벗어나 조금 높게 나오는 점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겪은 일의 크기를 생각해 본다면 이 정도를 가지고 크게 문제가 된다고 단박에 판단을 내리기는 힘들 것이고, 상담을 통해 케어할 수 있을 정도로 판단되니 조금 더 추이를 지켜보자는 얘기도 있었다.
나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수치로 계량된 나의 마음은 단순히 지켜본 사람이 보기에 어떻다는 말보다는 훨씬 신뢰감 있게 들렸다. 위험수치라고 하는 부정적 정서와 우울감, 고립감 같은 것들은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나를 가장 힘들게 하고 있는 문제들이다. 아울러 지금 나의 상태에서 정상일 수가 없는 수치들이기도 하다. 그런 것들을 제외한 나의 마음이, 이렇게 큰 일을 겪고 그래도 어떻게든 잘 버티어주고 있다는 사실은 꽤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내가 이렇게 애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금 더 나를 믿고 격려해주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
제가 생각보다 너무 잘 버티고 있어서 꿈에조차 한 번 다녀가지 않는 걸까요. 상담실을 나서기 전 나는 그런 의미 없는 질문을 했다. 특별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럴 사람이 아닌 걸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나는 그냥, 그의 칭찬이 조금 고픈 건지도 모른다. 정말로 수고 많고, 잘하고 있다고. 내가 다 안다고. 뭐 그런 말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