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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가을쯤이었던 것 같다. 정신적으로 굉장히 핀치에 몰린 일이 있었다. 일종의 번아웃 상태였다고나 해야 할까.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 하기 힘들 정도의 무력감에 시달렸다. 다른 건 아무것도 의욕이 나지 않았고 활자 및 텍스트 중독 상태로 뭔가 읽을 것들만을 게걸스럽게 읽어치우는 나날이 한 4개월 정도 지속되었다. 그래서 집 앞 도서관만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발아래가 허물어져 발이 닿지 않는 물속을 허우적거리는 것 같은 기분에 시달리던 나를 다잡아 준 책 중에 '오베라는 남자'라는 다소 낯선 제목의 소설이 있다.
이 책은, 사실은 그렇게까지 낯선 소설은 아니다. 소설 자체로의 인지도도 이젠 제법 생긴 편이고 심지어 영화화도 본국인 스웨덴에서 한 번, 헐리우드에서 리메이크로 한 번 해서 총 두 번이나 됐다. 헐리우드 판 리메이크에서 주인공 오베(여기서는 오토) 역은 무려 대 배우인 톰 행크스가 맡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나 내가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저 책을 집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북유럽권 소설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고 그래서 미지의 낯선 땅을 방문하는 방문객이 된 듯한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웃었다'. 시간이 얼마간 지나고 나서 그가 말하기를, 그 책을 읽을 때 내가 웃는 것을 보고 아주 조금은 안심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고 했다.
이 소설은 '오베'라는 고집불통 독거노인의 일상을 소개하는 '것 같은' 이야기로 스타트를 끊는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루트로 마을을 '순찰'하고, 평소와 같지 않은 것이 있다면 즉시 '시정'한다. 일평생 사브 이외의 차는 몰아본 적도 없고, 사브 이외의 차를 모는 사람들을 속물 혹은 머저리라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정원을 침범한 동네 길고양이와도 '싸운다'. 여기까지만 보면 소위 '1호선 광인'의 스웨덴 버전인 듯이 그렇게 생각되는 듯 보이는 오베는, 그러나 실은 얼마 전 평생 사랑하던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고,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 평생 휠체어를 타야 했던 아내를 위해 집안의 모든 가구의 높이를 낮추어서 만들어 놓은 자상한 가장이었으며 그런 아내의 죽음 후 만성적인 자살충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이 답 없는 고집불통 노인이 어떻게 생의 만년에 접어들어 이웃들과 화해하고 더불어 살아가게 되는지를 담담한(그리고 조금 코믹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나는 책 선물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책이라는 건 그야말로 읽는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와닿을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물건이어서, 내가 아무리 좋게 읽은 책이라도 남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고 반대로 내게 종이낭비 이상으로는 여겨지지 않던 책이 남에게는 인생의 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이 '오베라는 남자'라는 책을 사서 선물했었다. 그 당시 허공을 부유하던 내 마음을 붙들어준 기억에 남는 책 중 한 권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그의 책상을 정리다가 손 닿는 가장 가까운 곳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발견했다. 이 사람은, 저 책을 몇 페이지나 읽었을까. 책의 내용에 대해 아무런 말을 듣지 못한 걸로 봐서 다 읽지는 못한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나는 내가 사랑하던 사람을 먼저 보내고 뒤에 혼자 남은 오베와 같은 처지가 되어 있음을 절감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는 집안의 튼튼한 고리를 보면 저기에 목을 매달면 좋겠다는 생각부터 하는 오베 같은 자살충동에 딱히 시달리고 있진 않다는 정도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