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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룩 백'에 대한 약간의 내용 언급이 있습니다)
외근이 있었다. 그 핑계로, 점심을 먹지 않고 나간 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점심을 먹고, 약간 시간을 때우다가 미팅을 하러 가면 되겠다는 나름의 계산을 했지만 버스를 기다린다든가 밥을 먹는다든가 하는 각각의 프로세스에 너무 여유 시간을 많이 설정해 둔 것이 문제였다. 결국 약 두 시간 반 가량이 붕 떠버리고 말았다.
그때 내가 딱 너 그러고 있을 줄 알았다는 듯 핸드폰에 깔려 있는 영화관 앱에서 알림 문자가 왔다. '룩백'. 이게 그러니까, '체인소맨'인가 하는 요즘 한참 인기 있는 만화 그린 사람 작품이 아니던지. 고백하자면 '체인소맨'이라는 그 만화는 한 번 보려고 시도는 했으나 '내가 만화책을 보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은 건가' 하는 씁쓸한 감상만 남기고 중도하차한 전적이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너무 '힙'해서 사뭇 따라가기 어렵던 '체인소맨'과는 달리, 꽤 따뜻하고 찡한 이야기라는 평이 여기저기 올라와 있어서, 딱히 할 일도 없는 것을 핑계 삼아 한 번 보기로 했다. 한 시간 남짓한 러닝 타임도 부담이 없어 좋았고.
그리고 결론적으로, 마지막쯤에 좀 찔끔 울고 나왔다.
이 작품은 그냥 '만화를 그리는 소녀들'의 이야기다. 물론 이 소녀들이 끝까지 소녀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고, 중반부를 지나면서는 어른이 되고 그에 따라 후지노의 방에서 엄마가 갖다 주는 간식을 먹으며 영원히 같이 만화를 그리면서 살 것만 같던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긴다. 어른이 되었다고 인생의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는 것은 아니듯,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상대와 다른 생각을 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래서 결국, 같은 시작점에서 출발했지만 어느새 다른 길을 가게 된 두 사람의 인생에 하나의 사건이 찾아오고 그 사건을 통해 자신이 왜 만화를 그리는가를 돌아보게 되는, 그런 이야기다.
작품의 가장 후반부, 만화를 너무나 좋아하고 만화 그리는 일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 같던 후지노는 뜻밖의 말을 한다. 만화 그리는 일은, 사실은 그렇게까지 재미있진 않다고. 만화는 읽을 때나 재미있지 그리는 건 지루하고 힘들고 따분하다고. 그 말을 들은 쿄모토는 그럼 너는 왜 만화를 그리느냐고 묻는다. 이 애니메이션은 그 자체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뭔가를 창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추천한다는 인터넷의 평이 있었다. 그 말대로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왜 글을 쓰는가를 생각했다. 이 글로 돈을 많이 번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 이름이 나지도 못했는데 나는 왜 글을 쓰는가를.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심지어 주인공인 후지노의 답조차도 그 많은 답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나의 경우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기 때문에'가 제일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시의적절하게도 그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다가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이 드디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분의 놀라운 성취는 아마도 나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겠지만, 그분의 '쓰는 이유'와 나의 '쓰는 이유'가 어차피 같을 수 없으니 내게는 또 나만이 가야 할 길이 있겠거니, 그렇게 생각해 본다. 이참에 보다가 포기한 '체인소맨'을 다시 한번 재도전해 봐야 하나, 하는 생각도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