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Oct 14. 2024

꽃병에서도 꽃은 핍니다

-321

지금 그의 책상에 놓여있는 꽃은 자주색 소국이다. 국화는, 이미 몇 번이나 썼지만 그야말로 훌륭한 롱 릴리프라 앞전에 샀던 꽃들이 생각보다 빨리 수명이 다한 자리를 정말로 훌륭히 메꿔주는 든든하고 고마운 꽃이다. 이번 소국 또한 앞서 샀던 리시안셔스들이 생각보다 일찍 시든 자리를 훌륭히 잘 메워주고 있다.


그리고 나는 오늘 아침 꽃병에 물을 갈고 꽃을 다듬다가 본래 알던 것과는 '다른' 색깔의 국화가 몇 송이 섞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사 올 때 몽우리 상태로 있던 몇몇 송이가 꽃을 피우면서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몰랐던 색깔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아주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처음 사 올 때 봉오리 상태로 있던 꽃이 꽃병 속에서 개화하고 시드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의 그 새로 개화한 국화송이들은 조금 다른 느낌을 주는 데가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꽃병에 꽂아놓는 절화는 그건 살아있는 생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뿌리를 뽑히고 줄기를 잘린 채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다해가는 모습이다. 그래서 인간이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물을 갈아주거나 괴사하는 줄기의 끝부분을 조금씩 잘라서 그나마 건강한 조직으로 물을 빨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것 정도가 고작이다. 그래서 나는 꽃이 꽃병에 꽂히는 순간부터는 죽어가는 과정이라고 암암리에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연약한 식물들은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최선까지를 다해보는 모양이다. 벌 나비가 날아들 리도 없는 실내에, 그러니 아무리 곱고 아름다운 색깔로 꽃을 피워봐도 나 외에는 그 누구도 봐줄 사람이 없는데도. 응당 그렇게 태어났으니 언제 어떻게 떠나든 그것까지는 하고 가겠다는 결연하기까지 한 각오가 읽혀서 나는 잠시 숙연해졌다.


괜히 병솔을 가져다 꽃병 속을 깨끗하게 씻고, 새 물을 받아 국화를 꽂아 놓았다. 인생은 더러 더럽고 치사하고, 대개의 경우 마음대로 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이왕 태어났으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하고 죽겠다는 그 당연하다면 당연한 태도 앞에서 잠시 부끄러워졌다. 명색이, 저 꽃들의 수천 배 수만 배에 달하는 나날을 사는 인간으로서의 나는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투덜거림도 우는 소리도 오늘 하루는 좀 자제하고, 열심히 살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름을 칠 수 있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