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멘붕'하는 일이 있었다. 정확히는 좀 창피한 일이었다. 내가 끌어낼 수 있는 온갖 뻔뻔함을 다 동원해 괜찮은 척 했지만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어지는 일이었다. 덕분에 도대체 뭘 어쩌다가 일이 그렇게까지 돼버렸는가 하는 생각과 다 집어치우고 침대로 기어들어가 잠이나 자고 싶은 회피 본능과 괜찮아 그깟 일로 사람 안 죽어 하고 나 스스로를 다독이느라 오전 시간을 다 보냈다.
그렇게 오후 서너 시쯤 되니 그 스트레스의 영향인지 맹렬하게 뭔가가 먹고 싶어졌다. 다음날 아침의 체중계 눈금 따위를 걱정할 상황이 아니어서 일단 뭐라도 좀 잔뜩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맛있는 거라도 실컷 먹고 나면 위장으로 피가 몰려서 이 창피한 상황을 끝도 없이 되씹는 것도 좀 막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뭘 좀 먹어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며칠 전 산책을 나갔다가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명한 피자 프랜차이즈 매장 한 군데가 생긴 걸 발견한 기억이 났다. 오랜만에 거기서 '구운' 피자나 한판 시켜 먹을까. 그가 떠나고 난 후 내가 먹은 피자라는 건 대개 마트나 편의점에서 파는 냉동 피자였으므로 그 생각만으로도 조금 솔깃해졌다. 그렇게 '피자'라는 메뉴를 특정하고 주문을 한다면 무슨 피자를 어떻게 주문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다가, 불쑥 그 매장보다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예전에 그와 함께 종종 사다 먹단 한 판에 만 원 남짓한 중저가형 피자집이 한 군데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가만있자, 그게 벌써 대충만 생각해도 4, 5년 전인데 아직도 장사 하긴 하나? 인터넷을 뒤져 전화를 해 봤더니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만만한 포테이토 피자 한 판을 치즈 크러스트까지 곁들여 주문해 두고 피자를 픽업하러 집을 나섰다.
피자를 자주 시켜 드시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아시겠지만 피자 메이커들은 다 각각 나름의 특색이 있다. 이 집의 특징은 가격이 싸고 퀄리티도 나쁘지 않은 대신 피자의 크기가 작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한 판을 사면 그와 반 판씩을 간식으로 먹으면 딱 맞았다. 그땐 그랬었지, 하는 생각을 하며 가게로 들어가자 사장님이 반색을 하셨다. 세상에 너무 오랜만에 오셨네. 하도 안 오셔서 이사 가셨나 생각했지 뭐예요. 순간 나는 잠시 멍해지고 말았다. 이 가게에서 피자를 사다 먹은 것은 얼추 4, 5년 전쯤의 일이다. 그가 떠난 후로는 말할 것도 없고, 그가 떠나기 몇 년 전부터도 이 집에서 피자를 사다 먹지 않았었기 때문에 말이다. 저 기억하시느냐고 물었더니 사장님은 그 당시 이 가게 오픈한 지 얼마 안 됐었고 자리 잡는다고 고생할 때였는데 당시에 꽤 자주 오셔서 기억하고 있다고, 포테이토 피자 좋아하시는 것도 그때랑 똑같네요 하며 웃으셨다.
갓 구운 따끈따끈한 피자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한동안 거의 발을 끊다시피 끊었었는데도, 그래도 나를 단골이라고 기억해주고 계셨구나. 그가 떠나고 대인 관계 자체가 협소해져 버린 요즘에, 가끔 이대로 내가 사라져 버려도 아무도 나를 찾는 사람 따위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좀 우울해지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오전 내내 나를 괴롭힌 그 '멘붕'의 후유증도 조금은 가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한 조각 뜯어서 먹어본 피자는 과연, 요즘 냉동피자가 아무리 잘 나온다 해도 그것과는 맛이 달라서, 돈 조금 더 주더라도 웬만하면 금방 한 피자 사다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렇게 사 온 피자를 먹고 재 본 오늘 아침 몸무게는 역시나 각오했던 대로 전날 대비 1.2킬로그램이 불어 있었다. 괜찮다. 이 정도쯤은 하루쯤 간식 안 먹으면 된다. 정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