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봄날은 간다

-72

by 문득

선풍기를 새로 살까 말까 며칠씩 고민하던 것이 무색하게, 요 며칠 새 거의 선풍기를 껴안다시피 하고 살고 있다. 확실히 전에 쓰던 오래된 선풍기에 비해 모터 돌아가는 소리도 안 나고 리모컨도 잘 먹어서 이만하면 잘 샀다고 생각 중이다. 딱히 열대야라는 말까지는 아직 안 나온 것 같은데 몸에 휘감기는 이불이 더워서 잠을 깬 새벽도 몇 번이나 있었다. 봄 이불 싹 걷어치우고 여름 침구를 깔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벌써부터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7월은 들어서 해야 할 것 같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미련 떨지 말자. 내가 미련을 떨 수 있는 이유는 대개 그가 어느 정도 선을 그어주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봄인가 하면 여름이고 가을인가 하면 바로 겨울이다. 6월 중순쯤이 넘어가면 벌써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아무리 그래도 6월부터 에어컨 트는 건 좀 아니지 않으냐고 말하면 그는 6월이고 7월이고 더우면 틀고 안 더우면 안 트는 거지 그런 게 어딨느냐며 에어컨을 틀어주곤 했었다. 더워서 새벽에 잠을 깨면서도 7월은 되어야 여름 이불을 꺼내겠다고 버티고 있는 건 전형적인 내 식의 미련이었다. 이젠 그런 것에 딴지를 걸어줄 사람이 옆에 없다. 그러니 미련은 이제 그만 떨어야 했다.


침대에 깔린 토퍼며 패드를 싹 들어내고 털어서 새로 깔고, 작년에 장만했던 연한 녹색 여름 침구를 꺼내 깔았다. 얇고 까슬까슬한 재질이라 몸에 들러붙고 휘감기지 않아서 그는 이 이불을 참 좋아했었다. 집안 곳곳의 쿠션이며 방석들도 다 끄집어내 커버를 바꾸었다. 내가 하는 일이 대개 그렇듯, '하는 김에 이것까지'를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쿠션이며 베개 커버를 바꾸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가 마지막으로 이 침대에서 잤던 흔적이 다 지워져 버렸겠구나.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닌데. 그날 이 침대에 깔려 있던 이불이 무엇인지, 베개 호청이 무엇인지, 그런 것 따위 이젠 아무 의미 없는데. 그래도 그 짧은 수 초의 시간, 나는 마치 하면 안 되는 짓이라도 한 것 같은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나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침대에 앉아 숨을 골랐다. 결국 마치 허락이라도 받듯, 벽에 걸어놓은 그의 액자를 한 번 쳐다보고 나서야 나는 하던 일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침구를 바꾸고 쿠션 커버를 바꾸었다. 별 일 아니지만, 그래도 집이 좀 가벼워진 기분이 든다. 이제 여름이 가고, 지금과는 반대로 새벽녘 바람이 차서 잠이 깨는 날들이 오기 전까지는 나는 이렇게 살겠지. 내가 과연 언제쯤 올해 첫 에어컨을 켤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 거기서도 꽤나 미련을 떨지 않을까. 내가 하는 짓을 모르지도 않으면서 왜 그런 식으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는지. 나는 그런 귀먹은 원망을 결국 오늘도 빼먹지 않고 하고 말았다.


그가 떠난 봄은 오늘에서야 겨우 갔다. 진짜 봄은 이미 한참 전에 갔겠지만, 적어도 나에게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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