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애쓸수록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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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내가 글씨 연습을 하는 시간은 오후 여섯 시쯤이다. 나름 이걸로 오늘 하루 일과는 끝났다는 일종의 구분선인 셈이다. 글씨 쓰는 작업을 마친 이후로는 되도록 일을 하기보다는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웹 서핑을 하면서 쉬고 있다. 정주행으로 틀어놓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좀 집중해서 봐보기도 한다.


5월 초쯤, 텅텅 비어버린 하루를 메꾸기 위해 다분히 억지스럽게 시작했던 글씨 연습은 한 달 반 정도를 거듭해 이젠 꽤 자리를 잡았다. 나는 과거 겉멋에 취해 있던 시절에 내가 사놓았던 만년필이 파카 말고도 두 자루나 더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고 다른 잉크 두 병을 더 사서 각자 다른 색깔을 내는 만년필 세 자루를 준비해 놓고 하루씩 돌아가며 글씨 쓰는 데 쓰고 있다. 이 세 만년필은 각자 다 성격이 다르다. 파버카스텔은 좀 까칠하고, 파카는 순둥순둥하고, 라미는 무난하다. 그렇게 각자 캐릭터가 다른 만년필을 들고 각자 다른 색깔의 잉크로, 몇 주 전 내가 임의로 골라놓은 좋은 가사나 글귀들을 따라 쓴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글씨 연습은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수련에 가깝다는 느낌이 있다.


한동안 A4 다섯 장을 쓰는 데 꼬박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한 장 쓰는 데 10분 정도가 걸렸던 셈이다. 그렇게 다섯 장을 다 쓰고 나면 손이 다 쫙 펴지지 않을 정도로 온 손가락의 마디가 다 아파서 책상에 편 손을 올려놓고 왼손으로 문질러 한참이나 마사지를 해야 했다. 글씨 쓰기의 지루함보다는 그 손의 통증이 너무나 괴로워서 몇 번이나 중간에 그만둘 뻔했었다. 무엇에든 마음을 쏟을 건수가 하나라도 더 필요한 지금의 내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한참 전에 그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연습을 그만두었을지도 모르겠다. 남들도 다 이런 과정을 거치나 싶어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았지만 손에 힘을 빼고 쓰면 안 아프다는, 머리로는 알지만 실행이 어려운 조언들만 있을 뿐이었다.


며칠 전에 나는 좀 신기한 경험을 했다. 그날 분의 글씨를 연습하면서, 나는 내가 더 이상 글자를 '따라 그리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써야 할 문구를 쓱 읽어보고 그 위에 그냥 내 글자를 쓴다는 기분으로 쓰고 있었다. 그래도 한 달 반의 시간을 들여서인지 내 글자는 인쇄된 폰트의 획에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많이 비슷하게 따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써보니 속도는 원래의 반 정도로 빨라졌고 무엇보다도 다섯 장을 다 쓰고 난 후에도 손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아. 그렇구나. 손이 그래서 아팠던 거였구나. 한 달 반의 시간 동안 나는 '글씨'를 쓴 것이 아니라 글씨를 이루는 획과 곡선들을 '따라 그리고' 있었다. 내 것이 아닌 남의 흔적을 따라가는 데는 예상보다 많은 주의와 힘이 필요했고, 그 결과 한 시간 정도의 연습을 마치고 나면 손에 극심한 통증과 피로가 남았던 모양이었다. 그다음 날부터 나는 의식적으로 폰트를 따라 그리지 않고 그 위에 내 글씨를 쓰려고 노력했다. 며칠이 지나니 더 확실해졌다. 그간 나는 너무 애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손이 아팠던 거였다. 손의 통증이 덜하니 글씨 연습에 임하는 부담도 줄고, 그 과정도 훨씬 즐거워졌다. 그리고 그렇게 한 달 반 정도 노력한 결과로, 나는 얼마 전 한 문장 완성검사의 답안지에 꽤나 반듯해진 글자로 답지를 적어낼 수 있었다.


애쓸수록 아프다. 너무 용을 쓰면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니 조금 힘을 빼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를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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