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날, 봉안당도 다녀오고 케이크도 픽업할 겸 외출했다. 버스 안에서 언제나처럼 핸드폰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낯익은 이름 하나가 인터넷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름을 검색해 보니 뜻하지 않은 부고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순간 아, 하는 생각에 잠깐 망연해졌다. 그리고 마치 연관 검색어처럼, 몇몇 연로한 배우 분들의 성함과 얼굴이 주루룩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분은 뭐, 내 세대 정도까지만 해도 물론 수십 년 간 방송되었던 한 국민 드라마에서 '일용 엄니' 역으로 유명하시다. 아이구 일용아! 이눔아! 하는 특유의 괄괄한 목소리는 한때 성대모사 좀 한다는 연예인들의 단골 메뉴이기도 했었다. 정작 실제로는 아들 역으로 나오신 분보다 나이가 어리셨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입을 떡 벌렸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나보다 조금 아래 세대로 내려가면 '젠 젠 젠 젠틀맨이다' 하는 노래로 유명하셨기도 하다. 연기를 한평생 하고 나름의 고정관념이라는 게 있을 텐데, 저렇게 스스럼없이 '망가지는' 연기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참 대단하게 느껴졌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아울러 젊은 시절부터 맡은 '할머니' 역할 때문에 노인 분장에 가려진 '본판'의 미모를 보고 깜짝 놀랐던 것도.
그리고 그와 나에게는 또 조금 다른 의미가 하나 더 있다. 이 분은 한 캐이블 채널에서 본인의 이름을 걸고 쿡방을 하신 적이 있고, 그는 그 레시피를 열심히 주워 모아 나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뚝딱뚝딱 만들어주기도 했다. 물 몇 밀리, 설탕 몇 그램 하는 식으로 깐깐하게 따지는 레시피가 아니라 고춧가루 듬뿍, 소금 쬐끔, 후추 '는둥만둥' 하는 식의 진짜 엄마나 할머니가 가르쳐주는 식으로 나오는 레시피가 그게 정감 가고 좋다고 그는 말한 적이 있었다.
그가 떠나고 난 뒤로 유독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서 그쪽 세상으로 가시는 것 같다는 이야기는 이미 몇 번이나 한 적이 있다. 이 분의 경우는 그 레시피에 빚져 챙겨 먹은 끼니들 때문인지 단순히 텔레비전 속에서만 존재하는 연예인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가 싶기도 하다. 이렇게 하나하나 떠나가면, 나중엔 우리가 함께 기억하던 모든 것들은 죄다 저쪽 세상에만 있고 여기엔 하나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금 쓸쓸해졌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가신 곳에서는 본연의 미모대로 '예쁘고 발랄한' 역도 많이 하시기를 진심으로 빈다. 물론 정작 그분은 본인의 간판 배역이 '일용 엄니'인 것에 그 어떤 불만도 아쉬움도 없으실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