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택배가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까지 사흘에 걸쳐서 차곡차곡 날아와 집에 종이박스가 종류별로 쌓여 있었다. 아 저것 좀 내다 놔야 하는데 하는 말만 며칠 동안 하다가, 결국 나서는 김에 내놓기로,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제각각 사이즈가 다른 대여섯 가지의 종이상자들(가장 큰 것은 잘만 웅크리면 내가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 크기였다)에, 생수병 등 몇몇 부피 큰 플라스틱 재활용품에, 밑에 한 번 내려가는 김에 온갖 것을 다 버리려고 이것도 넣고 저것도 넣고 하다 보니 순식간에 박스가 그득하게 찼다. 다만 문제가 가장 바깥에 있는 커다란 박스는 우리 집 현관문을 통과하기 버거울 정도로 큰 사이즈였다는 것이다. 그 박스 하나만 달랑 버릴 거라면야 90도로 돌려서 옆으로 세워서 통과하면 되겠지만 그 안에 이런저런 것을 잔뜩 담아놓은 터라 안에 덤은 것을 쏟지 않고 현관문을 통과하느라 한바탕 곡예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가까스로 현관문을 통과하고 뒷발로 대충 문을 밀어 닫은 후, 박스를 두 손으로 들고 엘리베이터 쪽을 향해 걸어가는데 뭔가 발아래가 미끄덩 하는 감촉이 났다.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을 미처 하기도 전에 그대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손에 든 것을 미련스레 붙들고 있었던 것 같다. 다 자빠지고 난 후에야 면피 비슷하게 바닥을 짚긴 했지만 별무신통이었다.
지난겨울이던가 눈길을 걷다가 엉덩방아를 찧은 이야기를 한 번 글로 쓴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진짜 '양반'이었다. 아파트 타일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 찰진 충격은 그 강도가 고스란히 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영문 모를 물을 복도에 흘린 모양이고, 태산같이 뭔가를 들고 가느라 눈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내가 운 나쁘게 그 물을 밟아버린 것이다. 집에서 끌고 다니는 슬리퍼 바람이기까지 했으니 낙상은 예정된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아파트 복도에서 사람도 별로 없는 오전 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설설 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나뒹구는 박스며 그 속에 담았던 것들을 꾸역꾸역 주워 들고 1층으로 내려가 재활용 쓰레기장에 버렸다. 그러고 나니 그때부터 바닥에 찧은 엉덩이부터 바닥을 짚은 손바닥, 손목, 팔뚝에 어깨가지가 골고루 아파오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작년 겨울 눈길에 낙상했을 때 붙였던 파스를 꺼내 몇 조각으로 잘라서 여기저기 붙였다. 손이 안 닿는 등이라든가 하는 부분이 아프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좀 귀찮더라도 박스 하나하나 나올 때마다 내가 버렸으면 한 치 앞을 못 보고 가다가 영문 모를 물을 밟고 미끄러져 엉덩방아 찧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텐데. 어디 부러진 데는 없는 것 같지만(나이 먹고 제일 서러운 것 중 하나는 넘어지거나 자빠졌을 때 '뼈 부러진 것 아닌가'부터 걱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생각보다 근육통도 별로 많이는 남지 않아서 오른손 엄지 손가락 아래 도통한 부분이 꾹꾹 누르면 아픈 것을 제외하고는 이제 별로 아픈 데는 없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그 순간의 아찔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식은담이 난다. 앞으로는 눈앞도 안 보일 정도로 태산같이 뭘 쌓아서 한꺼번에 버리려 들지 말고 자주자주 조금씩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워낙에 뒷손 없고 귀찮은 거라면 세상 질색인 인간이라 과연 이 다짐이 언제까지 갈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이제 벌써 11월이고 다음 달이면 눈도 오겠지. 올 겨울은 정말로 낙상 조심해야겠다.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