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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Nov 27. 2024

첫눈의 맛

-365

떠나온 지 20년도 넘어서 아직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살 때까지만 해도 부산은 그야말로 '죽어도 눈이 안 오는' 곳이었다. 한 발만 벗어나서 밀양이나 양산만 가도 수태 오는 그 눈이, 부산만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배리어라도 둘러놓은 듯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일 년에 한두 번, 눈도 아닌 진눈깨비 비슷한 것이라도 올라치면 온 도시가 마비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무리 지구 온난화가 어쩌고 기후 변화가 어쩌고 하지만 날씨가 그렇게까지 잘 변하지는 않으니 요즘 부산이라고 크게 다르겠나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런 곳에 살던 내가 '윗동네'에 올라와서 처음으로, 그야말로 '펑펑 오는 눈'을 실제로 봤을 때 기분이 어땠을 건지, 그건 겪여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상경한 그 해에는 그야말로 기록적인 폭설이 내려서 지하철이 운임을 받지 않고 운행한 적도 두 번이나 있을 정도였다. 익숙지 않은 빙판길에서 종종걸음을 치다가 두어 번 정도 미끄러져 자빠지는 꼴까지 당하고서야 내 '눈 신고식'은 막을 내렸다. 그 이후로는 내게도 눈은 뭐 그리 좋지도 않고 설레지도 않고, 아이고 오늘 같은 날 출근하는 사람들 고생하겠구나 하는 때 묻은 감상이나 불러일으키는 그런 기상 현상으로 전락한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첫눈'은 예외다. 그해 처음 오는 눈은, 그래도 아직은 보면 반갑고 마음이 설렌다. 누가 그러더라, 눈이라면 치를 떠는 군인들조차도 첫눈까지는 좋아한다고. 하늘에서 순백의 영문 모를 결정체가 소복소복 내리는 광경은, 그로 인한 불편함은 접어두더라도 처음 내리는 순간의 경탄까지는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다만 그렇다. 첫눈이라는 건 대개가 애매하고, 그야말로 '찔끔' 내리고 마는 경우가 많아서 오늘 온 것이 첫눈이냐 아니냐를 두고 여기저기서 입씨름이 벌어지는 것에 묘미가 있다. 가끔 일이 바쁘거나 해서 그 시간에 눈이 왔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어서, 과연 올 해의 첫눈이 온 것이 언제냐를 두고 사람에 따라 '유권해석'이 달라지기도 한다. 뭐 그런 것까지도 첫눈다운 점이라 해야 할지.


그런데 올해의 첫눈은 그런 첫눈다운 수줍음이나 낯가림조차도 없는 모양이다. 이불속에서 한참을 꿈지럭거리다가 알림 문자 소리에 눈을 떴다. 무려 '대설주의보'라니, 저기 죄송한데 실례지만 올해 첫눈 아니세요? 이불을 걷어치우고 일어나 창밖을 보니 건물 지붕들에 소복하게 눈이 쌓인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이래서야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해놓고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고 토라진 사람에게 오늘 그게 무슨 첫눈이냐는 핑계조차도 대기 어렵겠다. 도대체가 낭만이 없어, 낭만이. 사람도 그러니까 눈도 따라가는 모양이네. 그렇게 중얼거려 놓고 다시 한번 화들짝 놀란다. 나 방금 좀 꼰대 같았지? 하고. 하기야 요즘은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애매한 약속 같은 걸 하는 게 되레 꼰대 같은 것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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