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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Dec 02. 2024

문제는 언제나 일요일에 생긴다

-370

그러니까 전날까지만 해도 그런 낌새라고는 요만큼도 없었다는 말이다. 전날이 뭔지, 새벽에 잠이 깨서 화장실에 다녀올 때까지만 해도 전구에 불이 나갈 낌새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냥 스위치를 켜면 밝아지고, 끄면 어두워지는 전구 본연의 임무를 묵묵하게 수행하고 있던 화장실 전구는, 그러나 그 하룻밤 사이에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던지 아침이 오고 세수 좀 하러 들어가니 그 길로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내가 너 그동안 많이 봐줬고 이제 더는 못 참겠다고 '손절'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나는 본래 전구를 살 때는 짝수개로, 두 개 혹은 네 개씩 사다 놓는 버릇이 있다. 아마도 지금으로서는 언젠지 기억도 안 나는 꽤나 예전에, 한밤중 혹은 공휴일에 전구가 나가 된통 고생을 한 기억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화장실 전구는 좀 예외인 것이 불을 그리 오래 켜두지 않아 한번 갈아 끼워두면 1년 이상은 가는 관계로 두 개씩이나 사다 놓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전구 여분을 모아두는 다용도실을 찾아보았지만 다른 전구들은 다 있는데 화장실에 쓰는 작은 전구만은 없었다.


꼭 일요일에 이러지. 누구더러 골탕 좀 먹어보라고. 그렇게 투덜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일이기만 하다면야 아무 문제없다. 그냥 휑하니 나가 하나 사 와서 대충 갈면 그걸로 끝이다. 다만 문제는 일요일이라는 것이다. 집 근처 철물점, 조명 가게, 생활용품 판매점 등등이 죄다 영업을 하지 않는다. 이제 여기서 전구를 사려면 버스씩이나 타고 집 근처 마트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 오며 가며 전구값만큼 나올 버스비가 아깝다면 걸어가도 되긴 하겠지만 눈이 뭐 여간 많이 왔어야지. 그 얼어붙은 길을 설설 기듯이 손가락만 한 전구 하나 사겠다고 나갔다 와야 될 것을 생각하니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하여간 꼭 일요일에 이러지. 누구 엿 좀 먹어보라고.


할 수 없다. 한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 나갔다 올 준비를 했다. 다른 데도 아니고 욕실 전구다. 책상 스탠드 전구나 방의 형광등 같으면 어떻게 하루 정도 불편을 참아볼 수 있겠지만 문을 닫고 써야 하는 욕실 전구니 이건 갈지 않고는 도리가 없었다. 오늘은 그래도 며칠 전 미친 듯이 눈이 내리던 그때에 비해서는 날이 아주 조금이나마 풀린 모양이니 조심조심 나갔다 오는 수밖에. 방 안에 앉아서 짜증만 내고 있는다고 나가버린 전구가 다시 되살아날 것도 아닌 바에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으니까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아닌 게 아니라 날이 조금 풀려 있었다. 조심조심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집 근처 슈퍼 생각이 났다. 거기 전구 팔려나?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방 형광등에 쓰는 큰 전구나 책상 스탠드에 꽂는 led 전구 같은 거라면야 요즘 여기저기 많이 쓰니 갖다 놓는다고 하지만 이런 조그만 전구를 팔까. 그래도 이왕 나선 김이니 밑져야 본전이다 하고 일단 그 슈퍼부터 들러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놀랍게도, 그 슈퍼의 전구 코너 가장 구석에 딱 하나 안 팔리고 남아있던 사이즈 맞는 전구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그렇게, 대충 한 시간 정도를 잡았던 외출은 싱겁게 10분 남짓으로 끝나고, 나는 아까 냈던 짜증이 무색하리만큼 기분이 좋아진 채로 집으로 돌아와 무사히 화장실 전구를 바꿔 끼웠다.


이번엔 운이 좋아 싸게 넘어갔지만 왜 이런 문제는 꼭 한밤중 아니면 새벽, 혹은 다 쉬는 공휴일 아니면 주말에 생기는지 모를 일이다. 다음번 마트 주문할 때 꼭 화장실 전구 여분도 같이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제발 좀, 불 나가기 전에 어두워진다든가 깜빡거린다든가 하는 신호 좀 보내주면 안 되는 거냐는 생각을 하다가 그렇게 따지면 그런 식으로 불쑥 내 곁을 떠나가버린 못된 사람 하나가 먼저 선수를 쳤구나 하는 생각에 또 새삼 씁쓸해졌다. 언제까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이런 식으로 생각이 가지를 치게 될 건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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