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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워지긴 추워진 모양이다. 밤이 되고 자리에 눕기 전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있으면 뭐 따끈한 것 좀 마셨으면 하는 생각이 부쩍 든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중국에 계신 지인에게서 선물 받은 녹차를 한 잔씩 우려다가 옆에 갖다 놓고 마시고 있다.
녹차와 홍차는 물론 차종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찻잎으로 만든다. 나는 홍자를 고등학교 때부터 마시기 시작했다. 순전히 겉멋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입에도 못 대게 하던 커피를 공부하는데 잠 쫓는다는 핑계로 마실 수 있게 된 것까지는 좋았지만 얘나 쟤나 다 마시는 커피는 어쩐지 너무 흔해 보여서 싫었다. 그래서 나는 다니던 독서실 근처 슈퍼에서 쌈직한 홍차 티백을 한 통 사다 놓고는 정수기에서 받아온 뜨거운 물에다 우려서 마시곤 했다. 자리 근처에 왔다가 홍차 향을 맡고 향 좋다고, 너 홍차 마실 줄 알아? 하고 묻는 친구가 있으면 그날 내내 뭐라도 된 듯이 으쓱했다. 물론 뜨거운 물에 티백을 담가 놓고 건지는 것을 잊어버려서, 그 시절의 홍차는 내게는 입도 못 댈 만큼 쓰디쓴 맛으로 기억에 남아있긴 하다.
그렇게 겉멋으로나마 마시기 시작한 홍차는 그렇다고 해도 비슷한 테이스트의 녹차는 꽤나 오랫동안 내 수비범위 밖이었다. 일단 뭔가 이미지가 할머니 같아서 별로였고 딱히 맛있지도 않은 주제에 홍차처럼 어딘가 있어 보이지도 않아서가 컸다. 뭐 다른 이유도 이것저것 대려면야 충분히 댈 수 있겠지만 결국 그 이유가 가장 크지 않았는가 싶다. 그렇게 꽤나 오랫동안 나는 홍차는 마시면서 녹차는 안 마시는 어딘가 좀 기괴한 입맛을 가진 채 살아왔다. 그렇게 '하대'하던 녹차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인사동에 갔다가, 지인이 권해주는 철관음을 한 번 맛보고서였다. 녹차에서 이런 맛이 날 수도 있구나 혹은 이런 게 녹차 맛이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야 비로소 했던 것 같다.
요즘은 녹차를 그야말로 없어서 못 먹는다. 쓰고 떫은 그 맛이야 변함없지만 그 맛에 대한 내 감수성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이려니 싶다. 은은한 풀내가 나는 그 향 또한 홍차의 향과는 다르게 어딘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데가 있어서 좋다. 그리고 사실 그 맛이니 향이니 하는 것도 물론이지만 커피나 홍차에 비해 건강에 좋고 몸에 좋은 성분이 이것저것 들어있다는 사실 또한 녹차에 대한 내 괴까다로운 성품을 누그러뜨리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이젠 슬슬 몸을 챙겨야 할 나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런 것 저런 것을 전부 떠나서, 하루 일과가 대충 끝나고 자투리로 남은 듯한 늦은 시간 느긋하게 하루를 정리하며 마시는 녹차 한 잔에는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풍미가 있어서 좋다. 나물이 그랬고 수정과가 그랬듯, 이젠 녹차 또한 어렸을 땐 쳐다도 안 보다가 나이 좀 먹고 나니 없어서 못 먹는 대열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구나 싶다. 이렇게, 이런 식으로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