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힌트

-78

by 문득

별 것 아닌 일인데, 가끔 머릿속에 금방 찍은 선명한 사진처럼 저장된 채 잊혀지지 않는 장면들이 더러 있다.


언젠가 그와 함께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을 때였다. 언제쯤이었는지 어디로 가던 길이었는지 그 도로가 어디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시내 도로는 아니었고 속도를 내서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였다는 것만 흐릿하게 기억날 뿐이다. 우리가 달리던 옆 차선에 빨간 뉴 비틀이 한 대 가고 있었다. 그리고 속도를 내서 그 차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 차에 타고 있는 어느 노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운전을 하는 할머니와 그 옆에서 즐거운 표정으로 뭔가를 이야기하는 할아버지. 나는 비명을 지르며 운전을 하고 있는 그의 팔뚝을 때렸다. 방금 옆 차선에 빨간 뉴 비틀이 한 대 있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운전하고 계셔! 두 분 너무 보기 좋다! 그 장면은 그 길로 언젠가 내가 가서 닿고 싶은 하나의 이상향의 이미지로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다소 시간이 걸릴 뿐 언젠가 나도, 우리도 그렇게 다정하게 함께 나이들어갈 수 있을 줄로만 알았었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건강이 이렇게까지 나빠지기 전부터도 종종 나는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할 것 같다는 말을 종종 했었다. 그 말을 하나도 심각하게 듣지 않았던 그때의 나는 그럴 때마다 그의 등짝을 때리거나 팔뚝을 꼬집으며 그런 소리를 그렇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하면 좋으냐고 그를 구박했다. 그런 이야기가 길어지면 급기야 화를 냈고, 가끔은 왠지 모를 분한 마음에 눈물을 쏟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참 끊임없이 잊을만하면 한 번씩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마지막 몇 개월간은 말없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고 아버지나 친오빠 같은 표정으로 빙긋이 웃으며 바라보기도 했다. 그런 그를 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었고, 그래서 웃으며 얼버무리거나 시답잖은 농담으로 자리를 모면해 도망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든 순간들이 다 그가 나에게 유언 무언으로 준 힌트였다. 나는 생각보다 빨리 네 곁을 떠날 것 같다. 그러니 내가 없더라도 부디 씩씩하게 잘 살아가라는. 그러나 나는 그의 그런 언외언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가 잊을만하면 한 번씩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는 사실은 신기하게도 며칠 전에야 불쑥 생각났다. 아침마다 청소를 하고 그의 사진 액자를 닦아놓으면서 하나씩 그와의 추억들을 꺼내보던 중에,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참 그런 말을 가끔 한 번씩 했었지 하고 새삼스레 떠올랐다. 뭔가를 미리 알아서 그랬을까.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상담사 선생님의 말로는 아무리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는 해도 떠날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칠 일을 미리 예감하는 경우가 꽤 많다고 하니까.


그렇게 생각한다. 이왕 줄 힌트였다면 조금 더 쉬운 말로, 멍청한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주지 그랬느냐고. 그랬다면 조금 더 다정했을 텐데. 조금 더 살가웠을 텐데. 무슨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고 짜증을 내는 대신 눈을 맞추고 한 번 더 웃어줬을 텐데. 핸드폰을 들여다볼 시간에 얼굴 한 번 더 보고, 쓸데없는 일들에 신경을 쓸 시간에 이야기라도 한 마디 더 나눴을 텐데.


한 치 앞도 몰랐던 나는 그 말이 그런 뜻인 줄 꿈에도 몰랐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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