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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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앱 하나에 계좌를 이것저것 등록해 놓고 쓰는 한 오픈뱅킹앱이 있다. 나는 이 뱅킹 앱의 아주 초창기 사용자다. 처음엔 다른 것도 아니고 돈 이체하는 것을 이런 '듣보' 앱으로 해서 될 일인가 싶었지만 한도도 일일 수십만 원밖에 되지 않기도 하고 인증서니 뭐니 하는 귀찮은 절차가 필요하지 않아서 큰 액수를 이체할 때를 제외하고는 곧잘 썼다. 그러던 앱이 이제는 자기 이름을 단 은행이며 카드도 만들 정도로 훌쩍 규모가 커졌으니 시간이 퍽 많이 지나긴 한 모양이다.


이 앱으로 어지간한 이체는 다 하다 보니 정작 본가라 할 수 있는 은행 앱에는 접속을 안 한지가 수개월쯤은 된 것 같다. 은행들의 입장에서도 이런 사정을 모르지는 않는지, 그 오픈뱅킹 우리도 할 수 있으니 할 거면 우리 은행 앱에 와서 하시라는 열렬한 구애를 해 온다. 거래하는 은행 중 하나가 자사 앱의 오픈뱅킹에 타행 계좌를 등록해 주시면 커피 쿠폰을 주는 이벤트를 한다길래 해놓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벤트로 주는 커피 쿠폰이 무려 다섯 장이며, 그 만료 날짜가 죄다 24년 12월 31일까지(즉 발견한 시점을 기준으로 한나절도 남지 않은 셈이다)라는 사실을, 나는 어제 점심까지 먹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자, 이제 이걸 어떻게 한다. 커피라면 워낙 좋아해서 없어서 못 먹는 나이긴 하지만 뜨거운 아메리카노 다섯 잔을 한 나절만에 먹어 치우라니, 이게 별로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마 이 쿠폰을 교환할 수 있는 카페가 집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한 군데 있긴 했다. 다섯 장 다 날려먹는 건 너무 아깝고, 그냥 한 잔이라도 바꿔 와서 먹자고 생각했다. 공짜니까, 그것만으로도 본전은 찾는 셈이겠지. 그렇게 이왕 뿌리는 쿠폰 날짜 좀 넉넉하게 주면 안 되는 거냐는 귀먹은 투덜거림을 입에 달고, 나는 긴히 카페까지 공짜 커피 한 잔을 얻어마시러 갔다.


앞사람의 주문이 다 끝나기를 기다리던 중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직원에게 한꺼번에 쿠폰 다섯 장이 사용이 가능한지를 물었고 된다는 대답을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사용기한이 10 시간도 채 안 남은 쿠폰 다섯 정을 전부 커피로 바꿨다. 그리고 그중 한 잔을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와 함께 직원에게 줬다. 그리고 남은 네 잔 중 세 잔을 자주 들르는 가게마다 돌아다니며 사장님들에게 한 잔씩 드렸다. 한 잔에 2천 원도 채 안 하는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고 다들 너무 좋아해 주셔서 괜시리 뿌듯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잔을 집으로 돌아와 오후 내내 홀짝홀짝 마셨다.


이로서 아까운 커피 쿠폰은 한 장도 낭비하지 않고 다 썼고 내 돈은 10원 한 푼 쓰지 않고 한 해 동안 신세진 여기저기 커피를 쐈으며 그 와중에 나도 공짜 커피까지 한 잔 마셨으니 한 해의 마무리로 이보다 더 좋은 마무리가 있을 수 있겠나 싶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 같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려고 한다.


unnamed.jpg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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