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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석 무렵까지도 식지 않는 늦더위에 뻗치는 소갈머리를 이기지 못하고 머리를 똑단발로 잘라버린 것이 벌써 몇 달 전의 일이 되었다. 물론 그렇게 머리를 자르고 난 며칠 후부터 귀신같이 날씨가 선선해졌다는 건 일단 접어두도록 하자.
자른 머리는 지금까지는 썩 만족스럽다. 일단 머리를 감는 것 자체가 길 때의 절반 정도 품밖에 안 드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립서비스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만나는 사람들마다 대개 몇 살 정도 젊어 보인다는 말을 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곱슬기가 있어서 제멋대로 말려들어가던 머리도 몇 달이 지나는 사이 약간 긴 덕분에 이젠 그렇게까지 너저분해 보이지는 않게끔까지 되었고 여차하면 늘 하던 대로 대충 질끈 묶을 수도 있을 정도의 길이이니 이만하면 충분히 돈값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짧은 머리가 한 가지 매우 불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는데, 새치를 뽑을 때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새치(라고 억지로 쓰고는 있지만 이제 내 나이쯤 되면 그냥 흰머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는 유전이라고 한다. 부모님이 흰머리가 빨리 나면 자식도 그럴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다. 내 경우는 아버지는 연세에 비해 흰머리가 거의 없는 편이었고 어머니는 또 반대로 꽤 젊으셨을 때부터 반백에 가깝게 흰머리가 빨리 났었으니 반반이라고 볼 수 있겠다. 어쨌든 이제 40대 중반이라고 하기도 슬금슬금 어려워지는 나이가 되면서 흰머리가 한두 가닥씩 나고 있다. 이걸 아직까지 거울씩이나 끼고 앉아 하나하나 섬멸할 정도의 성의는 없고, 머리를 감은 후 물기를 말리느라 풀고 있는 머리칼 중에 희끗희끗하게 보이는 것이 있으면 가려내서 뽑는 정도다. 사람마다 흰머리가 잘 나는 위치가 조금씩 다르다고 하는데 내 경우는 주로 관자놀이 근처에 나는 편이라 이렇게 눈에 띄는 것만 몇 가닥 뽑아도 훨씬 덜 눈에 거슬리긴 한다.
예전 머리가 등 중간 정도까지 올 만큼 길 때는 그 작업이 뭐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머리가 어깨 위로 훌쩍 올라갈 만큼 짧아지고 나니 거울의 도움 없이 눈만으로 한 가닥씩 섞여 있는 흰머리를 가려내는 것이 쉽지 않다. 분명 잘 붙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뽑고 보면 옆에 있던 애먼 검은 머리칼이라 따끔해 오는 두피의 살점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혀를 찬 기억만도 몇 번이나 된다.(기분 탓인지 모르겠으나 검은 머리칼은 뽑히고 난 후의 통증이 흰머리보다 몇 배나 되는 것 같다) 그렇게 눈앞에 아른거리는 흰머리 몇 가닥을 뽑아보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눈의 초점이 어그러져 잠시 사시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뭐가 그리 급해서 그 좋던 봄날에 그렇게 휑하니 달아나 버렸는지. 이럴 때 흰머리라도 좀 뽑아주지 않고서.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처럼 또 이렇게 잘 나가다가 기승전 푸념으로 글을 마무리짓는다. 뭐 도리 없을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