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후의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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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한 쌍의 연인이 있었다. 사랑한 끝에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지만, 남편은 시한부 판정을 받고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다. 홀로 남겨진 삶을 견딜 수 없어서 그를 따라갈 준비를 시작하는 아내에게 죽음이 가까워 온 남편이 생전에 써 두었던 편지가 한 장씩 배달되기 시작한다. 1997년에 개봉했던 영화 '편지'의 스토리다.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는 직접 찍은 비디오 영상이었고 오랜 투병 끝에 얼굴이 까맣게 변해버린 화면 속의 남편과 끝내 울음을 터트리는 남편의 영상을 부여잡고 화면 이쪽에서 같이 울던 아내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여자가 있다. 그녀를 움직이는 것은 '돈'에 대한 집착뿐이다. 현상금 사냥꾼이라는 직업답게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실로 무슨 짓이든 하는데, 그런 것치고는 실적을 올려 돈을 벌기만 하면 카지노에 가서 죄다 탕진해 버리기를 반복한다. 후반부쯤 그녀는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의 자신이 미래의 자신을 응원하며 찍은(비디오 레터 속의 소녀는 지금의 그녀와는 너무나 다른 밝고 구김살 없는 소녀였다) 비디오 레터를 보며 눈물을 글썽인다.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페이 발렌타인의 이야기다. 이 글의 제목인 '10년 후의 나에게'는 이 에피소드의 편제이기도 하다.


10년 전의 저에게서 편지를 받았다는 글이 자주 가는 카페의 게시판에 올라와 있기에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다. 10년쯤 전, 한 이동통신 회사에서 10년 후의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미리 써 둘 수 있는 서비스를 오픈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써 두었던 편지가 이제 10년을 채우고 배달된 모양이었다. 그때 편지 써두셨던 분들 확인 한 번 해보세요. 핸드폰 번호 바뀌셨으면 알림 안 가니 핸드폰 번호 갱신해 두시면 알림 갑니다. 그런 친절한 부연도 붙어 있었다.


가만있자. 나도 그때 호기심에, 타임캡슐에 쪽지 하나 써서 묻어두는 기분으로 뭐라고 끄적끄적 편지를 써 두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핸드폰 인증까지나 해 가며 연락처를 수정했다. 아차차. 핸드폰 번호가 바뀐 사이 두 통의 편지는 이미 열어볼 수 있는 기한이 만료되어 버려 열어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접속해 본 사이트에는 2014년의 내가 2024년의 나와 2034년의 나와 2044년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세 통이 남아 있었다.


순간 덜컥 무서워졌다. 저 편지 안에는 무슨 말이 적혀 있을까. 10년 전의 내가 어쩌고 살고 있었던지, 그런 걸 황급히 떠올려 보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오고 2년쯤 지난 후였던 것 같다. 그때도 내 삶은 여러 가지로 머리가 아팠지만 그냥 그게 전부일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 10년 사이에 내 인생에는 인생의 방향타를 바꾸어놓을 만한 일이 서너 가지쯤 벌어졌다. 물론 그중 하나가 3년 전 그가 내 곁을 떠나간 일이다. 다른 건 몰라도 2014년의 나는 20년도 30년도 아닌 불과 10년 후의 내 곁에 그가 떠나고 없으리라고는 아마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몇 번을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 열어보지 못했다. 그 편지 속의 내가 늘어놓고 있을 이야기가 어떤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와는 너무나 먼 곳에 있을 것만 같아서. 2024년의 나에게 보내는 이 한통이 문제가 아니었다. 20년 후의 나는, 30년 후의 나는 저 편지를 열어볼 수 있을까. 아니, 저 편지를 받을 수 있기는 할까.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나는 잠시 블루 스크린이 뜬 컴퓨터 같은 상태가 되어 한참을 버벅거렸다. 그리고는 몇 번 고개를 내젓고, 조용히 사이트를 껐다.


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쬐끔만 더 미적거려 보기로 했다. 이러다가 이번 편지는 개봉 기한이 지나버린 앞서 두 통의 편지처럼 슬그머니 열어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노리는 건 그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비겁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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