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이 같아도

-410

by 문득

뭐든지 직접 써보지 않으면 그 물건에 대한 감이 없게 마련이다. 만년필 잉크라는 것도 비슷하다. 내가 처음으로 돈 주고 산 잉크는 한 만년필 브랜드에서 윤동주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내놓은 블루블랙 색의 잉크였는데 45ml였다. 이걸 딱히 실사용할 생각도 없이 기념품 정도라고 생각하고 샀을 때는 그래서 이게 양이 많은 건지 적은 건지조차도 몰랐다.


내가 펜글씨를 시작한 것이 그가 떠나간 다음 달부터였으니 좀 있으면 어영부영 3년이 돼 간다.(물론 입원해 있던 석 달 정도는 쉬긴 했지만) 그 사이 펜글씨를 쓰느라 샀던 잉크들은 이미 한 번 물갈이가 되었고 조금 더 양이 많았던 이 잉크만 꿋꿋이 남아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이젠 슬슬 다 써가는 터라, 잉크의 수위가 눈에 띄게 낮아서 컨버터로 잉크를 빨아올리기 위해서 병을 이리저리 기울이는 등의 묘기를 좀 부려야 하고 그나마도 뭐가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아 아쉬운 대로 절반 정도만 겨우 찬 컨버터를 그냥 사용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색깔 자체도 워낙 마음에 들기도 했고 윤동주 시인 헌정 잉크라는 그 타이틀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던 바, 이제 슬슬 새 병을 사야 하나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냥 새 병을 사서 찔끔 남은 잉크를 그 병에 같이 부어서 쓰면 한 방울도 낭비 없이 잉크를 다 쓸 수 있을 테니 이거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 아닌가. 그래서 덜컥, 장바구니에 담아 놓은 잉크를 지르려다가 뒤통수가 좀 뜨끔해졌다. 이미 몇 번을 쓴 바 만년필 및 그 부속물이라는 것들은 대단히 로망스러운 물건들인 동시에 대단히 사람 귀찮게 하는 물건인 것도 사실이어서, 일단 이걸 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판매자님에게 제가 같은 모델 같은 컬러의 잉크를 쓰다가 바닥에 조금 남았는데 새 병을 사서 부어서 써도 될까요 하는 문의를 남겼다. 답글은 그리 오래지 않아 달렸다. 개봉 후 사용하신 잉크는 사용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물질이 혼입되었을 수 있기 때문에 새 잉크에 섞어서 쓰시면 잉크가 뭉치거나 굳거나 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으니 웬만하면 그냥 다 쓰고 새로 구입하시는 것을 권해 드린단다. 아니 무슨 하다 못해 간장도 아니고 와인도 아니고 어차피 공장에서 만드는 잉크가 이물질 혼입으로 뭉칠 일이 뭐가 있담 하고 투덜대다가 나름 잘 보관한다고 용을 쓰던 잉크 한 병을 곰팡이가 피어 고스란히 내다 버렸던 일이 떠올라 넙죽 입을 다물었다. 그저 하지 말라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제일 좋으니까.


뭐 이 참에 다른 메이커의 블루블랙 잉크도 한 번 사서 써보라는 말인가 보지. 또 적당히 속 편하게 그렇게 생각해 버리기로 한다. 세상은 넓고 예쁜 파란색 잉크는 이루 셀 수 없이 많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바닥에 남은 잉크들은 아무래도 영 아깝긴 하다. 잉크 알뜰하게 잘 긁어 쓰는 방법은 뭐가 있는지, 오늘부터 또 열심히 손품을 팔아봐야겠다.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오래 전 그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