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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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자주 가는 카페의 게시판에 정보성 글 하나가 올라왔다. 매주 목요일 밤에 방송되는 한 프로그램이 OTT 스트리밍이 안 되는 모양이니까 보고 싶으신 분들은 생방을 보셔야 할 것 같다는 글이었다. 아니, 도대체 이번주 주제가 뭐길래 스트리밍도 안 된대? 요즘 시절이 하 수상해서 민감한 정치적인 이슈라도 다루는 내용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확인해 본 결과 오늘의 주제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였다. 아, 그런 거라면 또 그럴 수 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은 저작권 문제가 몹시 까다롭고 복잡하다고 하니까.


스트리밍이 안 된다는 말은 높은 확률로 재방송도 용이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별로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더라도 이런 조건이 걸리면 안 보면 손해인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지상파 채널을 돌려서 그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2002년 월드컵도 그랬지만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도 비슷하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지만 두 번 세 번 봐도 좋고 흐뭇하다. 준결승 이승엽 선수의 투런 홈런 장면, 결승전 정대현 선수의 마지막 투구가 병살로 연결되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고 손뼉을 쳤다. 그러나 그 와중에 나를 기겁하게 만든 출연진의 멘트가 있었다. '지금부터 17년 전의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하는 말이었다. 17년? 17년 전이라고? 그게 벌써?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25-8=17이니, 그 일은 분명 지금부터 17년 전에 일어났던 일인 게 맞다. 이야, 그게 벌써 20년 전이야? 시키지 않은 이자를 3년이나 얹어놓고 보니 휘청 멀미가 날 만큼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사는 게 그리 녹록하진 않다. 그러나 그 무렵의 내 인생은 그야말로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뿐만 아니라 그도 그랬다. 우리는 둘 다 우울했고 둘 다 날카로워져 있었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괜히 싸우지 않기 위해서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던 그런 나날이었다. 그리고 그때 개최된 올림픽과 한 경기 한 경기가 드라마도 그렇게 쓰면 욕을 먹을 것 같은 스토리의 연속이던 야구 경기는 그 당시 그와 나의 아주 조그만 기쁨이기도 했었다. 문득 그때 생각이 나서, 잠시 아련한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에야 깨달았다. 저 프로그램은 그가 2022년 4월 7일 밤 나와 함께 본 마지막 텔레비전 프로그램이었다는 것을. 꽤 재미있는 구성의 좋은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 3년 가까이 내외라도 하듯 피해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을. 밥을 먹을 때 틀어놓을 만만한 프로그램을 찾아 헤매면서도 저 프로그램만은 절대로 틀어놓지 않은 채 지금까지 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 3년간의 수절 아닌 수절이 오늘 참 대수롭지 않게 깨졌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그의 사진 액자에 앉은 먼지만 티슈를 뽑아 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닦았다.


다시는 못할 것 같은 일들이 이런 식으로 하나 둘 금기가 깨뜨려지고 있다. 그냥 그쯤 해두라는 그의 뜻이 아닐까도 싶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려고 한다.


art_16141337587567_963e9d.png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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