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유통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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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그가 떠나기 얼마 전 집 앞 슈퍼마켓에 갔다가 새로 나온 라면이 진열돼 있는 걸 보고 두 개를 사 왔었다. 요즘은 대개 라면을 네다섯 개 단위의 팩으로만 팔기 때문에 낱개로 사서 먼저 먹어볼 기회가 흔치는 않다. 그래서 그 라면도 그런 식으로 한 번 먹어보고, 괜찮으면 다음번에 멀티팩을 사다 먹자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라면을 채 끓여먹어 보지도 못하고 먼저 떠나고, 그렇게 사 온 라면 두 개는 외출했다 돌아와 대충 끼니를 때우기 위해 내가 한 개씩 끓여먹는 걸로 소임을 다했다. 그 두 개 중 마지막 하나를 어제 끓여먹기 위해 꺼냈다가, 나는 라면의 유통기한이 고작 2주 남짓 앞으로 다가온 걸 알고 깜짝 놀랐다.


혼자 지내게 되면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것 중 하나가 음식물의 유통기한이다. 나름 꼭 필요한 최소한만 사고 있는데도 기한 내에 기분 좋게 뭔가를 다 먹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고 꼭 마지막 얼마쯤은 상해서 내다 버리게 된다. 저녁에 하나씩 꺼내먹는 요거트 같은 것들도 둘이 먹을 땐 그럴 일이 없더니 혼자 먹으려니 유통기한에 꼭 맞거나 겨우 하루 정도 마진이 있는 게 고작이라 하루 이틀 정도 건너뛰고 먹지 않으면 마지막 한 개 정도는 어김없이 유통기한을 벗어난다. 유통기한은 말 그대로 유통기한일 뿐이라 실제의 소비기한과는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날짜가 지나가버린 음식물은 지금의 내 처지를 상기시켜주는 것 같아 영 보기가 씁쓸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느끼는 것 중 하나는 그 '유통기한'이라는 것이 식품에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사실이다.


내 작가의 서랍 안에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감상을 제목과 문장 몇 개 정도만 대충 타이핑해 던져놓은 글감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그것들 중 상당수는 이제 유통기한이 지나버려 꺼내서 쓸 수 없게 되어버렸다. 더러는 내 생각이 바뀌어 더 이상 글로 남기고 싶지 않아지기도 했고 더러는 다른 글의 일부분으로 들어가기도 했으며 더러는 이제 조금은 식은 나의 가슴이 '아, 아무리 그래도 저런 글은 좀' 하면서 발행을 거부한다. 그래서 분명 서랍 안에 저장할 때까지만 해도 며칠 내로 정서해서 발행하겠다고 마음먹었던 숱한 글감들은 수명을 다해 벽에 걸려 말라가는 꽃다발처럼 그렇게 서랍 속에 박제되어 있다.


무엇에든 타이밍이 있는 것 같다. 식품뿐만이 아니라, 생각에도, 말에도, 글에도. 그때 그렇게나 간절했던 것들이 지금은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고, 그땐 대수롭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은 온몸의 피가 마를 만큼 절박하기도 하다. 그때는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던 말들이 지금은 차마 입밖에 꺼낼 수 없는 것들이 되기도 하고 그때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던 말들이 지금은 심장의 피를 토하는 기분으로만 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그에게 하려다가, 혹은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하고 이젠 청자를 잃어버린 그 말들처럼. 정말로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어서 서랍 속에 저장했지만 이젠 차마 낯부끄러워 꺼낼 수 없어져버린 그 이야기들처럼.


지난 4월 28일, 한참 땅에 발이 닿지 않는 기분으로 허우적대고 있을 때 써서 던져놓았던 글 조각 하나를 말미에 붙인다. 하고 싶은 말은 그때그때, 그 말이 시들기 전에 해야 한다는 하나의 뼈아픈 교훈으로써.


그냥 모르는 척 돌아와 주라.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고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좋다.
먼발치에서 당신이 숨 쉬고 살아있는 걸 보기만 해도 만족한다.
그러니 돌아와 주라. 모르는 척 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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