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에어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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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이 남루한 브런치에 들러서 내가 날이면 날마다 갱신하고 있는 청승의 목록을 지켜보신 분들이라면 아마 내가 얼마 전에 온갖 삽질과 저울질 끝에 선풍기 하나를 장만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이다. 선풍기를 사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며칠이나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도 나는 새로 산 선풍기를 아주 잘, 유용하게 쓰고 있다. 안 샀더라면 어쩔 뻔했을까 싶을 정도로. 틀어놓으면 모터 소리가 좀 심하게 나고 리모컨이 안 먹는다는 불편함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더 쓸 수 있었던 원래의 선풍기 대신 다른 것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내가 올해 과연 에어컨을 틀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 집 에어컨은 10년도 넘은 구식 모델이다. 에너지 효율도 별로 좋지 않고, 무엇보다도 기대한 만큼 냉방 효율이 좋은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해마다 여름이 돌아오면 에어컨 하나 새로 사야 하는데 하는 말을 그와 나는 벌써 몇 년째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어컨이라는 물건의 특성상 그 물건이 필요할 시기가 오면 구입이나 설치를 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그래서 올해까지는 어떻게 어떻게 버티고 내년에 새로 사자는 식으로 그 대화는 늘 흐지부지 끝을 맺곤 했다. 그리고 해가 바뀌면 우리는 다른 사는 일에 쫓겨 에어컨을 바꿀 거면 날이 바싹 더워지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는 사실을 늘 잊어버렸고 극성을 부리는 더위에 새벽에도 몇 번씩 잠을 깨는 시기가 오고서야 아 에어컨 바꿨어야 하는데 하고 후회했다. 아마 그런 탓도 있었을 것이다. 혼자 남은 내가 에어컨을 트는 것에 무척 회의적이 된 이유는.


날씨는 6월에 접어들면서 이미 더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새 선풍기는 새 물건 값을 하느라고 그런지 날개 뒤편의 모터가 과열됐다가도 예전에 쓰던 것보다 훨씬 빨리 식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미련을 떨면 그럭저럭 올여름은 에어컨을 건드리지 않고 날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아무도 그러라고 한 사람은 없었다. 상담사 선생님조차도 그 말을 들으시더니 과연 가신 분이 그런 걸 바라시겠느냐고, 괜한 고생은 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하실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어떻게든 올여름만이라도 에어컨을 켜지 않고 보내기로 혼자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건 여름이 '덥기만' 할 때나 가능한 다짐이라는 걸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며칠 전부터 장마가 시작됐다. 기승스레 몰아치는 빗줄기 때문에 도저히 창문을 열어놓을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집안의 모든 창문을 닫고 나니 그냥 곱게 덥기만 한 날씨가 그리워지는 눅눅한 불쾌감이 엄습했다. 이건 선풍기 가지고는 도저히 해결이 나지 않을 종류의 불쾌감이었다. 한 시간쯤을 고민했지만 내 인내심의 한계는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결국 나는 그의 책상 서랍장에 처박혀 있던 에어컨의 리모컨을 찾아 에어컨을 틀었다. 그러고는 에어컨을 튼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쾌적해진 집의 책상 앞에 앉아, 잠시 내 나약함과 미련함을, 알량한 양심을, 어설픈 이기심을 비웃었다.


난 그냥 내가 너무 잘 지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미 나는 너무 충분히 잘 지내고 있어서. 어쨌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내게 필요한 뭔가를 사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가끔 웃기도 하면서, 30년이나 내 인생을 공유했던 사람이 그렇게 순식간에 내 곁을 떠나갔는데도 너무 잘 지내고 있는 중이라서. 그래서 그 와중에 나 혼자 쐬자고 에어컨을 트는 짓까지는 차마 할 수 없다고, 하면 안 된다고, 뭐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명분 없는 의리는 너무나 허약한 것이어서 고작 장마철 소나기 한 줄기에 그렇게 스러지고 말았다.


그날 이후 나는 아주 뻔뻔하게 에어컨을 잘만 틀고 있다. 실내 온도 설정을 그가 해놓은 것보다는 한참 높게, 25도 정도로 맞춰 놓은 것이 이제 하나 남은 내 변명거리다. 아마 내 인생은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그가 없이는 할 수 없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하나 야금야금 해금돼 가겠지.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이런저런 자책감과 자괴감에 시달릴 테고. 그러나 그것 또한 혼자 남은 내가 치러야 할 내 몫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냥 그런 식으로, 남은 사람은 살아가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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