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을 걸을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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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어제의 봉안당행은 예상한 대로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집을 나서 보니 당장 오가는 자동차들의 바퀴에 짓이겨져 질척질척하게 변한 눈들이 길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아직 블랙아이스가 되지까지는 않아서 걷는데 큰 불편은 없었지만 가끔 잘못 디디면 삐끗 하고 몸이 홱 미끄러지는 느낌이 나서 잔뜩 긴장을 해야 했다. 그렇게 설설 기듯이 큰 길가로 나가니 연휴라 오가는 사람이 드물어서 그런 건지 인도 한가득 눈이 쌓여 있었고 그 한중간으로 사람이 오간 흔적만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을 따라 조심조심, 정류장까지 그리 길지도 않은 길을 벌벌 떨면서 갔다.


버스를 한 번 갈아타는 곳은 우리 집이 있는 곳에 비해서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이라 그런지 눈이 비교적 잘 치워져 있어서 별 어려움 없이 버스를 갈아타고 봉안당 앞 정류장에서 내렸다.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그의 봉안당은 등성이를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하는 곳에 있다. 길만 미끄럽지 않다면야 어렵지 않게 금방 갈 수 있지만 연휴라 그런 건지 눈이 거의 치워져 있지 않아 등성을 따라 난 인도 위로는 마치 두텁게 바른 바닐라 아이스크림 덩어리 같은 눈이 통째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드문드문 사람이 오간 자취를 따라 그나마 발을 디딜만하게 눈이 밟혀 있는 길이 한 줄로 나 있었고, 그 길을 따라 무슨 동계 올림픽에나 나오는 크로스컨트리라도 하는 기분으로 영차영차 등성을 올라가야 했다. 모르긴 해도 어제처럼 면허 없고 차 없는 것을 아쉬워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가끔 거꾸로 길을 내려오는 사람과 마주쳤고, 길을 비켜주기 위해 한 발만 옆으로 비켜도 잔뜩 쌓인 눈이 복숭아뼈를 지나 발목까지 파묻혔다. 중간중간 드러나 있는 배수구의 철제 덮개 위에서 열심히 운동화 바닥에 엉겨 붙은 눈을 긁어내 가며 가까스로 봉안당에 도착하고 나니 어찌나 힘을 주고 걸었던지 허벅지부터 종아리까지가 무지근하게 당겼다. 그렇게, 지도 앱에 의하면 고작 300미터 남짓한 등성이길을 한 번 오르내리고 나니 무슨 에베레스트까지는 아니라도 어지간한 설산이라도 하나 등정한 듯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먼저 그 등성이길을 지나간 누군가가 내 앞에 그 두텁게 쌓인 눈을 밟아 길을 내주지 않았더라면 어제의 내 걸음은 몇 배로 무거웠을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가 먼저 간 흔적을 따라 조금은 더디지만 올라갈 수도 있었고 내려올 수도 있었다.


눈길 걸을 때 어지러이 걷지 말라 오늘의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이니라(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라는 서산대사의 선시가 있다. 오늘 누군지도 모르는 먼저 간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눈을 헤치고 걸으면서 그 시를 다시 한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요즘 내 인생이 이렇게나 매사 두렵고 힘든 일 투성이인 건 한 발 앞에서 먼저 걸어가 주던 사람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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