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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떠나면서 우리 집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엄밀히 말하자면 쓰던 것을 다 쓰고 새것을 사다 놓지 않게 된) 물건이 몇 가지 있다. 그중에 한 가지가 '쌈장'이다.
삼겹살 구워 먹는 걸 싫어하는 한국인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 싶은데 우리도 꽤나 자주 이런저런 핑계로 삼겹살을 사다가 집에서 구워 먹곤 했다. 구운 삼겹살을 무엇에 찍어먹는 것을 좋아하느냐는 개인 차가 있겠지만 나는 단연 쌈장을 좋아했고 그는 그런 나를 위해서 시판으로 파는 쌈장에 마요네즈니 사이다니 과일잼 같은 것을 섞어서 적당히 되직해서 찍어먹기 좋으면서도 맛있는 쌈장을 따로 만들어주곤 했다. 레시피 좀 알려달라고 물어본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그는 그때그때 다르기 때문에 자기도 정확한 건 모른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던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 쌈장은 우리 집 냉장고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유는 별 게 아니다. 그가 떠나고 나서 나 혼자 먹자고 이걸 또 사겠나 생각했다가 결국 또 산 다른 것들, 이를테면 올리브 오일이나 굴소스 등등은 꽤 여러 군데 쓸 데가 있다. 그러나 쌈장은 오직 구운 삼겹살을 찍어먹는 용도 한 가지밖에는 쓸 데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떠나고 난 후에 삼겹살을 전혀 구워 먹지 않느냐 하면 그건 물론 아니지만, 그냥 적당한 가격의 대패삼겹살 정도나 사서 미리 프라이팬에 다 구워 와서는 비빔면 하나를 곁들여 대충 먹고 치운다. 이 과정에는 쌈장이 딱히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래서 그가 떠난 뒤로 우리 집 냉장고에서는 쌈장이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마트에서 이런저런 물건을 주문하다가 라면 코너에서 '쌈장라면'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한 팩 주문을 해 봤다. 라면이 다 거기서 거기지 하고 생각했지만 다른 라면보다 좀 더 농후한 다른 맛이 있는 것 같긴 했다. 하기야 라면 맛있게 끓여 먹는 레시피 중에 쌈장 한 숟가락을 넣는 것도 있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도 가끔 끓여 먹는 라면에 한 숟갈씩 넣어먹자고 쌈장을 따로 살 수도 없는 문제니 쌈장을 넣은 라면은 이런 식으로밖에 먹을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 인생 여기저기에는 이런 식으로, 그가 남긴 구멍들이 많이도 남아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