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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두 번에 걸쳐서 바늘로 한 번씩 봉오리 아래를 찌르고 줄기를 일자로 다듬어 꽂은 튤립이 줄기가 물러지는 일 없이 오래가더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튤립들은 대출 열흘 정도를 버티고 난 후 한 송이도 줄기가 물러지는 녀석 없이, 스무 송이 전원 얌전하게 시들어서 생을 마감했다. 그간 튤립 관리를 잘 못했구나 하는 것과 앞으로 튤립은 좀 더 부담 없이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후임으로 산 것은 판매 옵션이 무려 '제철 꽃다발'이라 내심 어떤 꽃들이 오려는지 몹시 궁금했다. 아는 꽃을 기다리는 것도 물론 반갑지만 이렇듯 '랜덤'을 주문해 놓고 어떤 꽃이 오는지를 기다리는 것에는 또 나름의 재미가 있는 법이다. 이번에 온 꽃은 흰색과 보라색의 스타티스와 흰 스토크, 그리고 벌써 나온 프리지아가 섞여 있었고 나름 '센터'로 거베라 한 송이가 들어 있었다.
이 꽃들을 다듬어서 꽃병에 꽂으려다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튤립에서 보던 그 '줄기가 물러지다 못해 주저앉는' 현상을 가장 먼저 본 꽃은 사실은 튤립이 아니라 스토크였다. 그를 떠나보내고 나서 처음 산 꽃이 프리지아였고 그다음 산 꽃이 스토크였는데 꽃도 예쁘고 향기도 깜짝 놀랄 만큼 좋았지만 저런 식으로 꽃대가 너무 빨리 물러져버려 생각보다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던 꽃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혹시나 스토크 또한 물올림이 너무 좋아서, 물을 너무 많이 먹게 되어서 빨리 꽃대가 물러진 건 아닐까 하는 나름의 합리적인 의심이 들어서, 이번 스토크는 앞서의 튤립들에게 그러했듯이 줄기를 사선으로 자르지 않고 전부 일자로 잘랐다. 봉오리를 바늘로 찌르는 건, 튤립의 줄기와는 달리 스토크 줄기는 퍽 단단하기도 하거니와 한 줄기에 딱 한 송이만 피는 튤립과는 달리 많은 꽃이 피는 스토크의 특성상 해줄 수 없을 것 같아 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로 스토크 또한 빠르면 사나흘 정도 지나면 슬슬 줄기가 물러지는 꽃이 나오기 시작하던데 이번 실험이 좋은 성과를 거둔다면 앞으로 스토크 역시도 조금은 덜 부담스럽게 살 수 있게 되겠지. 이번 실험의 결과도 나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볼 예정이다. 참 꽃 한 다발 갖다 놓고 혼자서도 재미나게 잘 노는구나 하고, 그는 그렇게 생각할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