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읽어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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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뜻하지 않은 일로 병원에 석 달 정도 입원해 있었을 때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었다. 문제는 이 책이 제대로 된 판본이 아니라 소위 적당한 분량으로 축약해 놓은 '축약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퇴원하고 집에 돌아가면 '페스트'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제대로 된 버전으로 읽어보겠다는 마음을 먹었었다. 그게 뭐라고 아직도 못하고 있긴 하지만.


내 기준에서 '페스트'는 '줄거리는 알지만 읽지는 않은 책'이다. 이 카테고리에는 꽤 여러 가지 경우가 해당되는데 책의 줄거리를 소개해주는 프로그램에서 봐서 내용은 대충 알지만 내가 읽지는 않은 책이라든가 원작의 내용으로 만든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은 봤지만 원작을 읽지는 않은 경우라든가 하는 식으로, 어디선가 책에 관한 매우 자세한 정보를 입수하긴 했지만 정작 책의 내용을 나 스스로 경험하지 못해서 아직은 그 책에 대해 쓰다 달다 말을 할 자격이 없는 모든 책의 경우가 해당된다. 여기에 걸려서 가장 많은 손해를 보는 것이 소위 '세계문학전집'에 단골로 들어가는 몇몇 유명한 작품등인데,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 이걸 굳이 또 읽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에 말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꼭 전체적인 스토리나 문장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문장의 배열이나 페이지의 공백이나 방점이 찍힌 단어의 사용 같은 모든 것이 나름 작가의 의도가 들어가 있고, 그런 것들을 전부 '스킵'해 버린 채 줄거리 내용만 그나마 직접 읽은 것도 아니고 어디서 들어서 아는 거라면 그건 작가의 의도대로 그 책을 소비했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건 너무 기준이 빡빡한 게 아니냐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렇다면 종이책이 아닌 이북으로 읽은 것은 책을 읽은 게 아닌가요? 요즘은 책의 내용을 '읽어주는' 오디오북도 많은데 그런 걸로 들으면 책을 읽은 게 아닌가요? 단호하게 그건 책을 읽었다고 볼 수 없다고 대답할 수 있는 건 '유튜브 독서 채널에서 책 소개하는 걸 보고 책을 읽은 듯이 구는 것' 정도일 뿐, 이 나머지 경우들에는 일괄적인 대답을 하기가 매우 어렵다. 바로 윗 문단에서 문장의 배열과 페이지의 공백 따위에도 다 작가의 의도가 들어있다는 거창한 말을 썼지만 그건 문학일 경우의 일이고, 자기 개발서 같은 실용적인 책의 경우는 사실 오디오북으로 듣거나 해도 괜찮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다 보면 내가 가진, 제법 깐깐한 척하는 독서의 기준이라는 것도 사실은 꽤 허술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도 그런 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스티븐 킹의 새 책이 나온다면 나는 그 사람들의 책을 굳이 이북으로 사려고 생각하진 않을 것 같다. 요컨대 내가 생각하는 독서라는 건 이북으로 사도 괜찮겠다 싶은 책은 이북으로 읽어도 되고 이북으로 사고 싶지 않은 책은 종이책으로 읽어야만 독서라고 인식되는 모양이다. 물론 이런 까탈씩이나 부리기에는 요즘 형편없이 책을 안 읽고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아침에 주문하면 저녁에 책이 배송되는 편리한 세상이다. 들락날락하면서 장바구니에 담아둔 책 몇 권을 슬슬 주문하고, 하루에 몇 장씩이라도 좀 읽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페스트'도, 이참에 그냥 같이 주문할까.


img_introduce_01.jpg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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