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 가도 짜장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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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가끔 인터넷에서 '냉장고 한 번 들어갔다 나온 음식은 먹기 싫어서 그냥 시켜 먹는다'는 글을 볼 때가 있다. 내 손으로 밥을 해 먹어보지 않았으면 뭐 그럴 수도 있지 혹은 요즘 배달비 비싼데 돈 많네 정도로 넘어갔을 것이다. 요즘은 대뜸 자기 손으로 밥 하는 것도 아니면서 저런 소리 하는 사람은 좀 맞아야 한다 정도로 태도가 다소 과격해졌다. 하루 한 끼만, 그나마 나 혼자 먹는데도 그렇다. 밥 한 끼를 차려도 모든 걸 '처음부터' 해야 하는 것과 냉장고에 든 것을 데우거나 다시 끓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부담감의 정도부터가 다르기 때문이다.


찌개나 카레 같은 것들은 그래서, 대단히 고마운 메뉴들이다. 한번 끓일 때 다소 귀찮긴 하지만 한 번 끓여두면 중간중간 건너 띄는 끼니까지 포함해 일주일 정도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고마운 메뉴 중에 카레보다 약간 범용성이 떨어지는 메뉴로 하이라이스가 있다. 얼마 전 불쑥 이 하이라이스가 먹고 싶어져서 마트에서 가루로 된 것을 주문했는데, 원 플러스 원 행사로 때아닌 짜장 가루가 한 봉지 같이 딸려온 일이 있었다. 하이라이스야 하이라이스인데 이 짜장가루는 또 뭘 해서 먹나 하는 고민을 약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심지어 싱크대 정리장 속에 몇 달 전 뜬금없이 짜장밥이 먹고 싶어져서 반쯤 쓰고 남아있는 짜장가루가 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래서 일단 그 쓰고 남은 가루부터 먹어치우자 하고 긴히 등심까지 약간 사 와서 짜장법을 해 먹어 보려고 살펴보니 뜯어놓은 짜장가루는 이미 유통기한을 한참이나 지나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굳어있지만 않았어도 눈 딱 감고 어떻게든 먹어치웠을 텐데(이 브런치의 독자님이시라면 유통기한이 다소 지난 식재료에 대한 나의 태도를 익히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이미 굳어버리기까지 한 것은 좀 선을 넘는 느낌이 있었다. 2천 원도 채 안 하는 짜장가루 반봉지 때문에 미련을 떨고 싶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남아있는 가루를 몽땅 버렸다.


뭐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내게는 공짜로 생긴 새 짜장가루가 한 봉지 더 있으니까 말이다. 가루를 뜯기 전에 잠시 고민했다. 짜장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의 성격상 이 짜장가루 역시도 오늘 뜯어서 절반쯤 쓰고 남으면 조금 전 버린 그 돌덩이처럼 굳은 짜장가루의 전철을 밟을 것은 뻔해 보였다. 그 짓을 또 해야 하는 건가. 잠깐을 고민하다가, 의외로 매우 쉬운 해결책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그냥 카레 끓이듯이 다 소스로 만들어놓고 쉬엄쉬엄 먹으면 되잖아.


그래서 반 개만 쓰려던 양파와 감자가 한 개로 늘어났다. 파기름을 내고 양파와 감자를 볶고 사온 등심을 넣고 표고버섯도 하나 썰어 넣은 후에 짜장가루 한 봉지를 냅다 풀어서 되직하게 짜장소스를 끓여 3분의 2쯤 덜어내고 남아있는 소스에 찬밥을 볶았다. 이왕 내친김에 계란도 두 개 풀어 부친 후 얹었더니 몇 년 전 유행했던 짜무라이스 비슷한 짜장밥이 되어서, 그걸로 주말 한 끼를 훌륭하게 잘 먹어치웠다. 남은 짜장소스가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인터넷을 찾아보니 역시나 '배우신' 분들이 파스타 면을 삶아 짜장 파스타를 해 드시기도 한다는 것을 보고 감탄을 했다. 남아있는 짜장소스는 또 그렇게, 어렵지 않게 잘 먹어치울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런 좋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탓에 고스란히 버린 짜장가루가 조금 아깝지만, 어차피 오늘 쓴 짜장가루는 구매 계획이 전혀 없던 중에 덤으로 따라온 것이니 결국 그게 그거 아닌가 하고 또 적당히 '정신승리'를 해 본다. 짜장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짜장밥을 하기 위해 등심을 조금 사 온 것 외에 추가 지출한 금액은 없으니까, 뭐 그걸로 된 거다. 왜 이럴 때 쓰라는 좋은 말이 있지 않은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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