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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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지난주쯤부터 슬금슬금 기온이 올라가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집안에 처박혀 있다 보면 아무래도 기온이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기가 힘이 들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화이트데이라고, 인사나 하려고 봉안당에 가보려고 입을 옷을 챙겨보려고 핸드폰을 열어 18도까지 올라간다는 기온을 보고도 별로 실감을 하진 못했다는 말이다. 아, 오늘은 패딩은 안 되겠군. 딱 거기까지였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딱 좋다는 정도였다. 아이고 이제 겨울 다 갔구나 정도가 나의 알량한 감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봉안당에 가서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올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봉안당은 산속까진 아니지만 제법 비탈을 타고 올라간 구릉에 있고, 사방이 다 트여있는 데다 주변이 온통 나무뿐이어서 실제 기온보다 조금 서늘하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그런 봉안당에서 내려오는 길부터 벌써 우정 껴입은 아우터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좀 걸어서 그렇겠거니 했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간만에 밖에 나와 밥 한 그릇 먹고, 서점 좀 구경하고, 가끔 가는 인테리어 소품샵을 구경하느라 약간 걸었을 뿐인데 옷 속부터가 후끈하게 느껴졌다. 옷을 벗어서 팔에 끼거나 손에 드는 것이 더 귀찮다는 자각만 없었으면 아마 아우터를 벗어서 들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들여다본 핸드폰 어플의 기온은 18도도 아닌 19도를 가리키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세상에나.


괜히 마음이 다급해졌다. 우리 집 침대에는 아직도 겨울 이불과 겨울 패드가 그대로 깔려 있고 패드 아래에는 전기장판도 그대로 깔려 있다. 옷장 정리는 물론이고 겨우내 입고 다니며 눈비 다 맞은 패딩은 이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꽃샘추위가 뒤통수를 때릴지도 모른다는 알량한 핑계를 대고 아직도 드라이를 하지 않았다. 이런데도 계절은 떼쓰는 어린애를 버려놓고 짐짓 총총 가버리는 무심한 엄마처럼 벌써 저만치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있다. 내가 워낙 게으르고 무딘 탓일까. 대개는 그렇겠지만, 꼭 그 이유 때문인 것만 같지는 않다.


지금부터라도 황새를 따라가는 뱁새 걸음으로, 집안 여기저기 널브러진 겨울을 부지런히 치워야겠다. 이러다 정말로 4월부터 11월까지 여름이라던 기상청의 경고 아닌 경고가 그대로 맞아 들어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래서야 올해 봄은 제대로 시작도 해 보기 전부터 벌써 지각이다. 딱히 게으름을 부린 것 같지도 않은데도.


SSI_20171217170727.jpg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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