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스프도 팔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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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찌개든 국이든 끓이는 중에 뭔가 밋밋하고 맛이 안 날 때 하나 톡 털어 넣으면 다른 간 일체 볼 필요가 없는 조미료가 하나 있다. 라면스프다. 가끔 식은 밥을 처리할 마땅한 메뉴가 없거나 입맛이 없거나 일전에 한 번 그랬던 것처럼 된통 배탈이 나서 죽을 끓여 먹을 때도 하나 뿌려서 끓이면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맛있어진다. 하기야 우리나라처럼 라면 많이 먹는 나라에서 난다 긴다 하는 연구원들이 머리 맞대고 몇 년씩을 연구해 뽑아내는 레시피를 가지고 제조한 것일 테니 맛이 없는 게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가 있을 땐 집에 꽤 많은 여분의 라면스프가 있었다. 그는 음식을 잘했고, 그래서 라면 사리는 필요해도 스프는 별로 필요하지 않아서 만일을 위해 쟁여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의 살림이 온전히 내 손으로 넘어온 지 3년째, 나는 라면스프를 쓰기 위해서 멀쩡한 라면을 뜯고 면 사리만을 남겨놓고는 그 면 사리를 어떻게 먹어치워야 하느냐로 골머리를 썩이는 처지가 되었다. 지금도 얼마 전 순두부찌개를 끓일 때 스프 하나 쓰느라고 뜯어버린 라면이 면만 남아서 저걸 도대체 어떡해야 하나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중이다.


어제 미팅을 마치고 그의 봉안당에 들렀다가 밥을 먹고, 필요한 물건 몇 가지를 사러 생활용품점에 들렀다. 이런 곳은 또 한 번 간 김에 이것저것 두루두루 돌아보고 눈도장을 찍어 놔야 다음번에 필요할 때 사러 갈 수 있다는 아주 훌륭한 핑곗거리도 있다. 3층이나 되는 건물의 꼭대기부터 1층까지를 차근차근 둘러보다가 나는 매우 재미있는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라면스프만 따로 포장한' 멀티팩이었다. 업소용으로 대용량 라면스프 가루를 따로 판다는 건 이미 알고 있긴 했는데 이렇게 '가정용'으로 본격적으로 파는 것은 처음 보는지라 매우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 라면은 면까지 다 든 멀티팩으로 사면 네 봉지에 3천 원 정도 하는데 스프만 다섯 봉지가 들어 2천 원이니 나름 그럼직한가 싶기도 했다. 사놓으면 언제 어떻게 써도 쓸 것 같아 덥석 집어 들고 나왔다. 요즘은 참, 별의별 물건을 다 파는구나 싶기도 했고.


아무튼 이래서 당분간은 라면스프 쓰려고 멀쩡한 라면 뜯어서 면만 남겨놓는 일은 없겠다. 남아있는 면사리는 간만에 계란 하나 삶아 넣고 떡볶이나 해서 오늘 한 끼 맛있게 잘 먹어치우면 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 많던 라면스프 다 쓰고 이젠 새로 사다 먹기까지 하냐고 그가 지청구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은 갈수록 좋아지는데 당신은 뭐가 그리 급해서 그렇게 총총히 갔는가 하는 청승맞은 생각을, 또 어쩔 수 없이 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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