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어깨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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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매주 월요일에 뵙는 상담사 선생님과는 이제 제법 격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상담 기간이 석 달째에 접어들면서는 조금씩 농담을 주고받는 여유도 생겼다. 밥 해 먹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식사는 안 거르고 잘 챙겨 먹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제가 정말 할 줄 아는 음식이 없어도 너무 없더라고요. 오빠가 쓰던 컴퓨터에 보면 음식 레시피들만 쭉 정리해놓은 즐겨찾기 폴더가 있는데 그거 보고 따라서 만드는 것도 제대로 못해서 매번 음식 맛이 어딘가 어설퍼요. 그 말에 상담사 선생님은 웃으면서 그렇게 대꾸하셨다. 뭐야. 정말 공주처럼 살았던 거잖아요.


그가 떠나고 난 후 내가 깨달은 사실 하나는, 나는 그를 만난 열아홉 살 이후 특정 부분의 성장판이 완전히 닫힌 상태였다는 것이다. 나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혼자서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단순히 기술적인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의 요령 같은 문제를 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트에서 장을 볼 때만 해도 그렇다. 물건을 골라 카트에 담고 카드번호를 넣고 결제하는 것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쌀은 얼마 만에 얼마 정도씩 사야 하는지, 한 달에 한 번 주문하는 것 기준 생수는 몇 팩이나 시키면 되는지, 파나 양파를 상해서 버리지 않고 알맞게 먹으려면 얼마나 주문해야 하는지, 아침 대신 먹는 두유에는 어떤 종류가 있으며 각자 어떤 특징들이 있는지 하는 것들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 요즘 나의 일상은 이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에 함부로 달려들었다가 내가 뭔가를 잘못했음을 뒤늦게 깨닫고 나이를 마흔이나 넘게 처먹고 이런 것 하나도 혼자서 못하냐고 스스로를 구박하는 순서로 항상 이어지고 있다.


내가 부딪히는 이런 문제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인터넷을 검색하는 것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터넷은 대개 매우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정보만을 알려줄 뿐, 개개의 상황에 딱 맞는 최적화된 대답을 주진 못한다. 그래서 특정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인터넷을 검색해 보는 건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순간이 왔을 때 그는 어떻게 했던가를 필사적으로 기억해 내는 것이다. 다행히 그와 나는 아주 오랜 기간을 함께 지냈고 어지간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거의 대부분의 일에 관한 데이터가 있긴 하다. 그래서 나는 마치 인간의 패턴을 학습해 모방하는 AI가 된 기분으로 더듬더듬 그가 하던 대로 따라 해 본다. 그리고 100 퍼센트까진 아니라도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는 것을 착잡한 기분으로 지켜본다.


어제는 에어컨에서 물이 새는 것을 발견하고 잠시 패닉에 빠졌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는 그가 하던 대로 에어컨의 커버를 벗기고 필터를 꺼내 청소한 후 창가에 널어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에어컨을 켰더니 별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을 언급한 대로 나는 올여름에 에어컨을 틀지 않으려고 했었고, 그래서 그가 늘 본격적으로 에어컨을 돌리기 전에 필터를 청소하던 루틴을 빼먹어버렸던 것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이왕 커버를 연 김에 에어컨 탈취제를 하나 사다가 내부에 골고루 뿌렸다.


열아홉 살 이후로 그만 쳐다보고 있으면 거의 대부분의 문제는 알아서 해결됐었다. 그리고 그 좋았던 시절은 이제 다시는 오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나 스스로를 돌보고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쳐다만 보는 것으로 알아서 해결됐던 그 많은 문제들은, 실은 그가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온갖 애를 써 가며 나를 위해 해결하고 있었다는 것도 이제는 좀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지금에서야. 지금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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