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미터 떨어진 김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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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그저께 사람의 멘탈을 박살 낸 일은 하루를 더 갔다. 이번엔 일의 범위에 분명히 포함되어 있지 않던 걸 내밀면서 이것까진 해주셔야 한다고 한다. 워낙에 속이 좁은 인간이라 그런지 대번에 전날 일정 일을 자기 뜻대로 밀어붙이지 못한 반대급부로 이러는 거구나 싶은 못난 생각이 들었지만 도리 없었다. 전날은 내 뜻대로 했으니 오늘은 그쪽의 면도 세워줘야 했다. 이거 처음에 얘기 안 된 거 아시죠 하는 단서를 달고, 일단 그것까진 해주기로 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오늘 일과 전까지' 필요하다는 말이 따라왔다. 이쯤에선 기껏 가라앉힌 성미가 불끈 치솟는 느낌도 들었지만 이왕 해주기로 한 거 괜히 말 한마디 더 보태봐야 불편한 상황만 길어질 참이어서 부글부글 끓는 속을 꾹 누르고 하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했다.


그런 대화를 나눈 것이 오전 11시 30분경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밥맛이 싹 달아났다. 게다가 어제는 식단상 새로 밥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밥 먹는 것도, 나 먹을 뭔가를 따로 만드는 것도 아랫동네 식 말로 '덧정이 없었다'. 성질대로 할 것 같아서는 밥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해 달라는 거나 냉큼 해치워서 싫은 기색 잔뜩 내며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됐다. 꾹 참고, 나가서 뭐라도 대충 빨리 한 그릇 먹고 오기로 했다.


밥 한 그릇 먹자고 멀리 나갈 기분도 들지 않아 집 근처 가까운 햄버거 가게에 가서 세트를 먹었다. 하루에 그나마 한 끼 먹는 거 이렇게 먹으면 나중에 배고픈데. 들어갈 때 김밥이라도 사갈까. 김밥이라는 건 물론 이럴 때 참 좋은 선택이긴 하다. 다만 문제는 우리 집 근처에는 김밥집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1킬로미터 이상 걸어가지 않고 사 먹을 수 있는 것은 편의점에서 파는 김밥뿐이며, 나는 다른 건 몰라도 편의점에서 김밥 종류는 웬만해서 사 먹지 않는다. 입맛을 쩝쩝 다시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달 어플을 켜서 집 근처에 김밥집이 있는가를 검색해 봤다. 그리고 매우 어이없게도, 나는 우리 집에서 고작 127미터 떨어진 곳에 김밥집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좀 어안이 벙벙해졌다.


새로 생긴 가게였다. 이 가게 전에 무엇이 있었는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워낙 가게가 자주 바뀌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이어서 홀에서 밥을 먹고 있는 손님들도 있었다. 참치김밥 한 줄을 포장하고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볶음밥과 덮밥, 간단한 분식류를 팔고 있었는데 가격은 요즘 물가를 생각하면 매우 저렴한 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에서 가까운 밥집'이라는 어마어마한 메리트가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 미팅 갔다가 봉안당 들러서 돌아올 때 와서 정식으로 밥을 한 번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밥은 그의 말을 빌자면 손은 있는 대로 가는 주제에 결과물이 너무 소박해서 고생한 품이 안 나오는 대표적인 음식이다. 생전 이름도 처음 듣는 음식도 꽤나 자주 만들어주었지만 그는 김밥만큼은 집에서 잘 싸지 않았고, 그래서 가끔 김밥이 먹고 싶을 때면 김밥 한 줄 사자고 차까지 끌고 나가야 했었다. 이젠 집 근처에 쌈직한 김밥집도 생겼는데 같이 먹을 사람도 없어서 참치김밥 한 줄만 달랑 사들고 돌아오는 길이 좀 쓸쓸했다. 뭐 그랬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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