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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때쯤 또 나 하나 먹여 살려 보겠다고 도마를 꺼내 놓고 이것저것 총총 썰고 있었다. 어디선가 매우 기분 나쁜 퍽 하는 소리가 났다. 거실 쪽 형광등이 나가는 소리였다. 안에 들어가는 두 개의 형광등 중 하나는 벌써 애저녁에 나갔고 하나가 그나마 살아있었는데 이 녀석 또한 얼마 전부터 영 비실비실하더니 기어이 수명이 다해버린 모양이었다.
이 거실 쪽 형광등으로 말하자면 몇 달쯤 전에, 큰 방의 형광등이 나가서 갈 때 그냥 눈 딱 감고 같이 갈았어야 했다. 그래야 여러 모로 편했다. 우리 집은 연식이 다소 된 집이라 천장이 높은 편이다. 아니 실은, 그냥 내 키가 난쟁이 똥자루만 해서 어지간한 받침대를 놓고는 형광등 갈기가 쉽지 않다. 우리 집 형광등은 형광등을 끼운 소켓 위를 두꺼운 유리 덮개가 덮고 있는 구조여서 받침대 위에 올라서서 까치발까지 든 후에 머리가 핑 돌 정도로 고개를 쳐들어야 겨우 덮개까지 무사히 씌울 수가 있다. 그러는 중에 혹시나 이 덮개를 떨어뜨리기라도 해서 깨뜨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손이 벌벌 떨리는 건 덤이다. 이 끔찍한 노릇을 도저히 두 번 할 기력이 나지 않아 방 형광등만 갈고 모른 체 내버려 둔 것이 기어이 사달이 나고 만 것이다.
지금 당장 불편한 건 없다. 불을 자주 쓰는 주방은 전등갓 높이가 낮기도 하고 얼마 전에 전구를 갈아 끼워서 당분간은 걱정이 없다. 요즘 나는 거실에서 딱히 뭔가를 하지 않기도 하고, 그나마 겨울을 지나면서 날이 많이 길어져서 어지간한 일은 굳이 불을 켜지 않아도 그럭저럭 해낼 수 있긴 하다. 그러나 집의 한 구석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몹시 신경이 쓰이긴 한다. 이럴 때 마트 같은 곳에서 쓰는 세 칸 정도 발을 딛고 올라가는 사다리 같은 것만 있으면 좋을 텐데. 이 참에 하나 살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깟 형광등 하나 갈자고 사다리씩이나 돈을 주고 사야 하는 건가 생각하면 역시나 회의적으로 변하고 만다. 그래서, 또 우리 집에서 발받침대로 쓸 수 있는 것 중에 그나마 제일 높은 장식장을 거실까지 질질 끌고 나가서 형광등을 갈고, 그 서슬에 훤히 드러난 장식장 아래를 다 청소하고, 다시 질질 끌어다 갖다 놓는 짓을 또 해야만 한다는 건가. 여기까지 생각하니 딱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짐짓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래서 현재 우리 집 거실에는 공식적으로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여러 소리 할 것 없다. 내 키가 10센티만, 아니 5센티만 더 컸어도 장식장까지나 끌어올 필요 없이 식탁 의자 정도로 어떻게든 '쇼부'를 칠 수 있지 않았을까. 도대체 남들 다 크는 동안 키도 안 크고 뭘 했나 하는 생각에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그냥 앞으로의 내 삶은 내내 이렇게 내 키를 원망할 일밖에 남지 않았구나 싶은 생각에 조금 서글퍼지고 말았다. 그냥 이쯤에서 조그만 사다리를 하나 사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