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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을 웬만큼 마무리지어놓고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핸드폰에 문자 한 통이 들어와 있는 걸 너무 늦게 발견했다. 며칠 전 농민 분에게 직접 주문한 감자가 집 앞으로 안전하게 배송되었다는 택배 기사님의 문자였다. 그러고 보니 게시판에 올라온 글 하나만 보고 덥석 감자값부터 입금해 놓고는 언제나 보내줄 건지 확인도 안 했구나 하는 생각에 내심 찜찜해하던 것이 떠올라 판매자인 농민 분에게 짐짓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일도 아닌 농사짓는 분이 그런 걸로 거짓말 같은 걸 하실 리가 없는데.
문 앞에 놓여 있는 박스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박스를 본 순간 나는 내가 감바 10킬로그램을 주문하면서 막연하게 한 5킬로그램짜리 박스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감자 박스는 내 생각보다 훨씬 컸고 무거웠으며, 당연히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은 감자가 들어 있었다.
집에 있던 신문지를 몽땅 꺼내 와 적당하게 찢어서, 그걸로 하나하나 감자를 감싸서 예전 감자를 많이 샀을 때 담아두던 박스에 담았다. 그러나 절반도 채 다 담지 못했는데 박스는 금방 꽉 차고 말았다. 감자를 감쌀 신문지도 다 떨어진 참이었다. 이젠 도리 없었다. 남은 6킬로그램 이상의 감자를 이대로 방치해 둘 것이 아니라면 나가서 뭔가 방법을 찾아와야만 했다.
불문곡직 옷을 갈아입고 집 앞 편의점에 가서 그럴싸한 종이박스 하나를 얻어 왔다. 문제는 신문지였다. 집 근처 어디에서도 신문지 비슷한 것을 구할 수가 없어서, 두 블럭 정도 떨어진 편의점에 가서 잘 읽지도 않는 일간지 한 부를 일부러 사 와야 했다. 하늘은 뿌옇게 흐려 있었고 그 와중에 바람은 사람 하나 날려 보낼 수도 있을 기세로 불어댔다. 편의점에서 얻은 박스를 방패 삼아 바람을 막아가며, 가까스로 집에 돌아와 남은 감자를 싹 싸서 박스에 담았다. 꽤 큼직한 박스를 얻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남은 감자는 그 박스에 온통 그들먹하게 가득 차서, 내가 감자 10킬로그램이 얼마만큼인가에 대한 감을 전혀 잡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감자를 다 싸 넣고 나자 온 손이 신문을 찢고 감자를 싸느라 묻어난 잉크며 흙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좀 전에 박스며 신문지를 구하느라고 바깥을 좀 돌아다니다가 갖은 미세먼지와 황사를 정통으로 맞은 것이 생각나 결국 다 감은 머리를 새로 감고 샤워도 다시 한번 더 했다. 그런 번잡한 과정을 거치고서야 감자 10킬로그램은 무사히 우리 집에 안착했다.
그지없이 귀찮았고 아 그러게 왜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감자를 10킬로그램이나 사서는 하고 내내 투덜거렸지만 자그마치 구황작물을 10킬로그램이나 쟁여놓고 보니 마음은 그지없이 든든하다. 이젠 정말로 감자가 많으니 감자를 많이 먹어야겠다. 이 모래바람 부는 날 바깥을 헤매가며 신문지까지나 사 와서 건사한 감자가 썩거나 물러져서 버리기라도 하면 많이 아까우니까. 그리고 하루에 샤워를 두 번이나 하게 만든 이 강풍이 좀 잠들고 오늘은 비라도 좀 듬뿍 내려줬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