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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 넷이 사는 집에서 전기밥솥을 두 개 놓고 살아본 적이 있으신지? 나는 그래본 적이 있다. 취업을 해서 서울로 올라오기 직전쯤이었으니 그것도 거의 30년 가까이 전의 일이긴 하지만 그때 그랬다. 문제는 할머니였다. 어느 날부턴가 할머니는 당신의 밥에서 냄새가 난다며 밥그릇에 든 밥에 숟가락 한 번 대 보지 않고 팽개치듯 밥솥에 도로 부어놓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시곤 했다. 똑같은 밥솥에 똑같은 쌀로 똑같은 시간을 들여서 하는 밥인데 당신에게 드린 밥에서만 냄새가 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데도 그러셨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당신이 드실 밥은 손수 따로 하시겠다면서 작은 전기밥솥 하나를 사 오시기까지 했다.
그 무렵부터 할머니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큰방에 가서 장롱을 뒤지셨다. 뭘 찾으시냐고 물어봐도 딱히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급기야 할머니와 어머니가 좀 언성을 높이는 일이 벌어졌다. 매번 뭘 그렇게 뒤지시냐고 언짢은 표를 내시는 어머니에게 할머니는 급기야 그런 말을 하셨다. 네가 내 옷 훔쳐가지 않았느냐고. 세상에나. 할머니와 어머니는 당연한 말이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고, 두 분 사이에는 20년도 넘는 나이 차이가 난다. 아무리 그래도 중년의 여자가 입는 옷과 노년의 여자가 입는 옷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지 않은지. 이 말에 기가 질린 어머니는 아무 대꾸도 못 하셨고, 할머니는 그 후로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큰방에 불쑥 들어가 장롱을 하나하나 뒤져보곤 하셨다.
여기에서 대충 짐작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할머니는 알츠하이머셨다. 그러나 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이라고 딱히 뭐 뾰족한 방법이 없는 병이니 지금부터 근 30년쯤 전 그때야 말할 필요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약을 써서 낫게 할 수 있는 병도 아니고 그나마 벽에 뭔 칠을 하진 않으니 어쩌겠냐고, 모든 식구가 그냥 그렇게 '편찮으신 분'이 하는 막말을 꾹 참는 수밖에는 없었다. 할머니와 가장 많이 부딪혔던 건 어머니였지만 아버지와 나도 무사하진 못했다. 할머니는 걸핏하면 '니들끼리만 맛나는 것 처먹고 늙어 뒤질 노친네한테는 한 입도 안 주느냐'고 역정을 내셨고 아버지나 내가 당신의 옷가지나 패물들을 훔쳐갔다고 믿고는 집안 여기저기를 뒤지셨다. 그리고 가장 곤란했던 건 그런 실제로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고모들이며 삼촌에게 전화해서 수시로 일러바쳤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몇 년간 집안에는 크고 작은 다툼이 끊이지를 않았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참 힘든 시간이었던 기억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요즘 엄마랑 자꾸 싸운다는 지인이 한 분 계신다. 그런데 그 어머님의 증상이 너무나 할머니와 비슷해서 얘기를 듣다 말고 소름이 끼쳤다. 지인 분이 인터넷에서 주문해 온 갓 도정한 햅쌀에서 냄새가 난다고 멀쩡한 쌀을 몽땅 바리고 본인이 사 온 새 쌀로 밥을 하신다는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아이고 소리를 내뱉었다. 우리 할머니가 좀 그 비슷하셨는데 알츠하이머셨다는 말을 했더니 지인 분은 우리 엄마 아직 그 정도 연세는 안 되셨다며 대번 언짢은 기색을 하셨다. 사람 일 모르는 거고 우리 할머니가 꼭 그러셨어서 하는 말이라고, 쉽지는 않겠지만 어머니 잘 설득해서 병원 한 번 가 보라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물론 지인 분께서는 전화를 끊기 직전까지도 내내 언짢은 기색을 내시긴 했지만.
나도 지인 분의 어머니가 알츠하이머 따위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후로 벌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슬프고 참담한지를 웬만큼 겪어봤기 때문에 더 그렇다. 피 섞인 가족이라곤 해도 좋은 낯으로 웃으며 볼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은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