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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이비 글라스 Apr 13. 2020

독서실의 추억

단편소설

영선이는 같은 반의 진수와 한 달 전부터 사귀고 있다. 중간고사 시험기간이 되자 성적이 높은 편인 진수는 공부에 관심이 별로 없는 영선이에게 쉬는 시간마다 수학 문제집을 갖다 놓고 풀이를 해 주거나 영어 단어 책을 주면서 같이 외우고 체크해주었다. 

진수는 수업시간에 책에 필기도 열심히 하는 편이었다. 그의 필통 안에는 색색가지의 하이테크 펜이 가지런히 정렬되어있었고, 빨강, 노랑, 연두, 보라색 등의 각종 형광펜도 있었다. 시간표에 따라 각 과목의 선생님들이 수업을 하고 나서 다음 수업으로 바뀌기 전에 방금 들은 과목의 핵심 내용을 간단히 복습하고, 다음 수업 책을 펴서 오늘 배울 내용을 미리 훑어보았다. 그리고 학교 종례 후 독서실에 가서 배운 내용을 정리하고, 집에 가서 조별 과제나 수행평가 과제를 마치고 잠이 드는 것이 일상이다. 

진수가 밤에 정리한 것들을 학교에 가서 영선이에게 공유해주어 성적에 관심도 없었던 그녀의 마음이 이제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그래서‘나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진수가 가고 싶어 하는 대학교에 입학해서 같이 다니고 싶다!’라고 결심하게 되었다.    

  

영선이는 공부는 소질이 없었지만 체육시간에는 날아다녔다. 각종 구기종목에서 에이스의 역할을 해냈고, 체육선생님은 그런 그녀에게 체육특기생을 권유하였다. 

진수의 도움으로 이번 시험에서 영선이는 전 과목 평균 성적이 20점 가까이 올라 전교 석차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물론 진수도 평소처럼 전교 10등 안에 들었다. 내신 성적 원점수 및 석차 꼬리표가 나오자 둘은 서로의 손바닥을 치며 하이파이브로 기쁨을 표현했다. 

어느 날, 체육선생님이 영선이를 불러서 수시모집에서 체육특기로 원서를 내보자고 말했다. 그래서 수시모집에 응시했고, 1차에 합격을 했다. 이제 대학 수학능력시험에서 주요 영역 3개 부문에서 각각 2~3등급 이상이 나오면 진수가 목표한 우리나라 최고 학부에 입학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진수도 그런 그녀가 대견했고,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러는 동안 진수 또한 내신 성적이 향상했고, 수능을 통한 정시모집을 대비하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드디어 대학 수학능력 평가 날이 되었다. 역시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콧등에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는 매서운 바람이 불고, 급격히 기온이 떨어졌다. 학생회 후배들은 시험장 교문 앞에서 준비해온 응원 플래카드를 펼쳐서 힘껏 “선배님, 시험 대박 나세요!”를 외치며 따뜻한 커피를 종이컵에 담아 한 명씩 나눠주었다. 영선이는 적당한 긴장감으로 시험을 치르는데 그날따라 평소보다 더 컨디션이 좋았다. 듣기 평가에서 집중이 잘 되었고, 문제를 풀면서 길어진 지문에도 곧 적응을 해서 OMR카드에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표기하는 속도도 적절했다. 시험이 끝나자 종이 쳤고, 비교적 담담하게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한편, 진수는 컨디션을 위해 철저히 대비해서 아침에 청심환을 마셨다. 그리고 교문에서 받은 커피를 한잔 마시며 1교시 언어영역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일단 듣기 평가에서 순조로웠다. 언어영역은 그럭저럭 잘 본 것 같았다. 수리영역은 특히 그가 제일 자신 있는 것이라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기대감도 있었다. 중간쯤을 풀고 있을 때 갑자기 배가 ‘사르륵’ 아파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그러다가 말겠지 하고 무시한 채 집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5분, 10분……. 흘러가면서 점점 배에서 신호가 강해졌다. 아직 몇 문제가 더 남은 상태에서 거의 뱃속은 전쟁터로 변했다. 식은땀이 나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복도 감독에게 요청하여 함께 화장실로 향해야 했다. 그 충격으로 외국어영역도 듣기 평가에서 앞부분 몇 문제를 놓치게 되어 전체적으로 시험을 기대보다 못 보게 되었다. 집에 도착해 가채점을 하면서 시험지에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야 했다.  

    

한 달 뒤 원점수와 백분율 환산점수가 나왔고, 영선이는 2~3등급이 나왔지만, 진수는 정시모집이라 목표대학교에 입학하려면 전 과목이 1등급이어야 했는데 설사 때문에 수리영역과 외국어영역에서 약간의 차이로 2등급이 나와 목표대학이 멀어지고 말았다. 

결국 그 해 영선이는 가기로 했던 대학교의 사회체육과 학생이 되었고, 진수는 쉴 시간도 아까워서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그래서 영선이는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진수가 안타깝고 미안한 생각에 마음껏 합격소식에 기뻐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둘은 서로 격려해주며 봄을 맞이했다. 내년에는 꼭 같은 학교에서 놀자고 다짐했다. 진수는 괜히 자기 때문에 눈치를 보는 영선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열심히 공부를 했다.      

각종 대학 축제가 열리고, 벚꽃축제로 한창인 봄날이 되었다. 영선이는 혼자 힘들게 공부하고 있을 진수가 생각났다. 그래서 그에게 꽃구경을 가자고 졸랐다. “나도 가고 싶지. 지금 나 놀리냐? 너는 너만 생각하지?”하며 짜증을 내는 그의 반응에 실망했다. 물론 이해가 가긴 했지만 그래도 서운했다. 그래서 같은 과 친구들과 함께 꽃 축제에 놀러 갔고, SNS에 사진도 올렸다. 같은 과 남자애들과 선배들이 ‘좋아요’를 누르고, 농담들이 올라왔다. 진수는 스마트 폰을 끊었지만 오랜만에 들어가 보니 영선이가 인기를 즐기는 듯이 화사하게 찍은 사진을 올리고, 얄밉게 남자들과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갑자기 그 모습을 보니 가슴속에서 천불이 올라오듯 뜨거워졌다. 너무 열 받아서 괜히 시비를 걸며 “내덕에 공부해서 좋은 대학교 들어가더니 이제 나를 배신하냐.”하며 안 해도 될 말까지 해서 싸우게 되었다.  

영선이는 싸운 뒤 며칠 뒤에 생각해보니 진수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고, 예전에 사이가 좋았을 때가 그리웠다. 그래서 그녀도 어차피 1학기 중간고사 기간이니 공부도 할 겸 진수와 작년에 함께 공부를 하던 그들의 집 근처 독서실에 같이 가자고 했다. 

오랜만에 예전 생각이 났다. 그러면서 책을 펼쳤는데 주변에 앉은 고등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머리카락을 탈색해서 거의 흰색이었고, 귀에 피어싱이 있었다. 화장실에 가면서 스치는 바람에서 담배의 향을 느꼈다. 그들은 말끝마다 'C'로 시작하는 단어를 읊어댔다. 다혈질인 영선이는 그들의 무례함에 화가 났다. 

“진수야, 쟤네 뭐야. 뭐라고 좀 해봐.”

“내……. 가?”

“응, 왜? 못하겠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쟤네도 이제 곧 집에 가지 않을까?”

그러나 30분이 흘러도 그들의 목소리는 더 거칠고 커질 뿐이었다.

마침내 영선이가 폭발해버렸다.

“휴……. 안 되겠다. 한마디 해야지. 야! 너네! 공부하러 왔으면 조용히 공부나 해. 떠들지 말고.”

“아, C! 뭐라고? 누가 반말했냐? 너네야? 따라 나와!”

“욕하면 무서운 줄 알아? 진수야, 나가서 쟤들 정신 좀 차리게 해주자.”

“......”

그래서 복도를 지나 건물 뒤쪽 공터 분위기의 공간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들은 5명쯤 되는 남자 고등학생들이었고, 그들의 얘기에서 그들 중에 2명은 학교폭력으로 퇴학, 정학을 받은 상태였다. 그들이 타다가 골목 귀퉁이에 세워둔 오토바이도 보였다.     


그 날 처음으로 진수는 그녀를 만난 것이 후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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