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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Oct 17. 2022

처음, 지분을 요구하다

10월이 되면 어떤 장면을 만나러 간다.


나뭇잎이 바람에 움직이고, 햇살이 더해지면 반짝반짝 윤이 났다. '소로로로' 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면 마음이 고요해졌다.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이 열리는 공원에는 공원 의자에 엎드려 글을 쓰는 사람, 카페 책상에 노트를 펼친 채, 연필을 물고 고민하는 사람. 바닥에 돗자리를 펴고 가져온 책상을 펼쳐 글을 쓰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보통 글은 집에서 혼자 외롭게 쓰는데, 그곳에 가면 무언가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어 외롭지 않았다. 특히 어르신들이 글을 쓰는 모습을 보면 뭉클해서 몸 속에 있는 물들이 일렁여 눈에 고였다.


10시쯤,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해서 신청을 하고, 원고지를 받아 근처의 카페에 들어갔다. 늦게 도착한 나는 어느 곳이 집중하기 좋은 공간인지 살펴보았다. 1층은 사람이 적었지만 부산스러웠고, 2층은 집중하기 좋아 보였지만 사람이 많았다. 고민하다가 2층의 글을 쓰는 할머니 옆에 자리 잡았다.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은 올해로 40회를 맞이했고, 그 자리에서 시제가 발표된다. 9시부터 2시까지 글을 완성해서 제출하고, 당일 바로 심사가 이루어지고, 5시에 발표를 했다.




어떤 시제가 나올지 누구도 모른다. 그날은 <숨바꼭질, 액자, 통조림, 의심>의 주제가 발표되었다. 시, 산문, 아동문학(동화, 동시) 중 동시를 택했고, 쓰는 시간보다 생각하는데 더 오래 걸렸다. 일단 숨바꼭질을 주제로 정하고 어떤 소재를 할까 고민하며 노트에 끄적였다.


양말도 신발 속에 숨어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았고, 코딱지도 손가락을 피해 딱 달라 붙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주제 다 쓰다 보니 뭔가 밋밋했다. 생각은 단시간 안에 튀어나와야 했다. 그것이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의 묘미였다.


순간

'말에 뼈가 있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말속에 뼈가 숨어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 문장으로 시작해 생각을 뻗어나갔다.





<말속에 숨어 있는 것/ 고하연>


할머니,

말은 뜨거운 치킨이에요?


아니면

달달한 갈비예요?


말속에 뼈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할아버지,

말은 짭조름한 고등어예요?


왜 사람들은

말에 가시가 있다고 해요?


말속에는 물감이

숨어 있어요


친구와 이야기하면

서로 다른 생각의 색깔을 알 수 있거든요.


말에는 대일밴드도

들어 있어요


넘어진 내게

친구가 괜찮냐고 물으면


커다랗던 아픔이

작아지거든요


다정한 말을 주고받을 때

마음이 점점 자라나는 걸 보면


말속에는

새싹도 숨어 있어요.





두 시간만에 동시를 완성했다. 상을 받지 못해도 그 시간에 쓴 세 편의 시는 남아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었다. 원고지를 제출하고 가을의 정취를 만끽했다. 아르코 미술관에서 하는 전시도 관람하고, 나태주 시인님의 강의도 듣고, 요조의 노래를 들었다.


5시 발표가 시작되었고, 운이 좋게 아동문학 장려상을 받았다. 의외의 일이었다. 워낙 동시를 좋아해서 자주 동시를 찾아 읽었고, 쓰기도 했지만 매번 신춘문예에 떨여졌다. 번번이 낙방하니 좋아하던 마음은 시들어 갔다. 그래도 정말 동시가 좋았는지, 시들했다가 다시 피어나기를 여러 번이었다.



시상식 후 남편과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했다.

아이가


"엄마 정말이야? 축하해 축하해."

라며 같이 기뻐해 주었다. 더불어 상금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엄마, 평소에 나를 주제로 글을 많이 썼잖아. 그러니까 상금 받으면 나한테도 5만 원 나눠 줘야 해."

라고 했다. 나는 웃음이 났다.

"근데, 이거 <아이의 말대꾸>로 쓴게 상 탄게 아니라, 여기 와서 주제 나오면 직접 동시 써서 받은 거야."

라고 설명했다. 은근히 선을 그었다.

"그건 아는데, 평소에 엄마가 글 쓰는데 내가 소재가 되어서, 글 실력이 향상된 거잖아. 그러니까 나도 받을 자격이 있지."

"그건 맞지. 맞네."


아이의 정확한 자기표현에 설득이 되었다. 끊임없이 글을 쓸 수 있던 건 아이의 말 덕분이었다. 아이의 말이 내게 와닿으면 글을 쓰고 쓰고 싶은 마음이 피어났다.

집으로 돌아와 나중에 상금을 받으면 나눠 주겠다고 했다.


"엄마가 상금 나눠 주면 그걸로 뭐 할 거야?"

"아이브 가을 언니 앨범 사야지."

"앨범 집에 있잖아."

"그거 말고 다른 앨범."

"또? 노래 같은데?"

"그 안에 다른 포토카드가 들어 있거든."

"포토카드 한 장 얻으려고 14000원 자리 CD를 또 산다고? 돈이 너무 아까운데."

"아니야. 가을 언니 부자 되게 하는 거니까 하나도 안 아까워."


나는 속으로 엄마는 가난해지고 가을 언니는 부자 되고?라는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언뜻 생각해도 꼰대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깨달은 건, 좋아하는 마음이 쌓이면 과정도 행복하고, 결과도 해피엔딩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마음으로 아이가 좋아하는 마음을 후원하게 되었으니

그 또한 아름다운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가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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