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하연 Sep 28. 2022

처음, 줄임말을 쓰다

마상

      

2개월의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학교는 방학이었지만 학원은 방학이 아니었다. 아이가 방에서 숙제를 하다가 나왔다.     


“방이 너무 추워. 거실이 따뜻하다. 나와서 할래.”     


소파 대신 뜨끈한 바닥에, 내가 덮고 있던 이불속으로 쏙 들어왔다. 둘이 꼭 붙어 나는 책을 읽고 아이는 수학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한 문제를 풀고 창밖의 밧줄(윗집에 베란다 창문을 교체하는 것 같다)을 바라보고, 한 문제 풀고 자기 앞머리를 만지고, 두 문제 풀고 귀를 후비고를 반복했다. 방에 있었다면 몰랐을 아이의 행동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자니 마음속에서 가스레인지 불이 켜졌다. 감정 냄비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최대한 내 책에 집중하려고 노력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아이는 또

“엄마, 여기 흰머리 있다. 내가 뽑아줄게.”

“린아(중저음으로) 엄마 흰머리는 괜찮으니까, 숙제 먼저 할래?”

“마상”     




아이는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다시 연필을 쥐었다. 내 마음속 냄비에 끓던 말이 결국 넘쳤다.


“마상은 내가 더 마상이야. 수학 한 페이지 푸는 것보다 다른 것 하는 게 더 많잖아. 한 번에 집중해서 하면 금방 끝나는 걸 왜 자꾸 딴짓하는 거야?”


결국, 참았던 말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아이가 스스로의 모습에 멋쩍었는지 웃기만 했다.


마상

마상


살면서 우리는 누군가의 말에 상처를 받는다. 안 아픈 척한다. 마음이 안 베인 척한다.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마음에 대일밴드를 붙이기도 하고, 붕대를 감기도 한다. 알지 못하는 말상처가 쌓이면 병이 되기도 한다.



아이는 내 말에 어떤 고민도 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표현했다.


"엄마 잔소리 좀 그만해."라던가

"하면 되잖아."라는 말화살로 돌려주지 않고

마상.이라는 단어로 자기의 아픔을 투명하게 드러냈다.



어른이 되면서 부정적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배워본 적도 없고, 관계가 엉킬까 봐 속으로 끙끙 앓았다. 그런 내게 아이의 귀여운 표현은 감정 카드 같았다. 속상한 마음을 표현했지만, 받아들이는 나도 마음 상하지 않고 괜찮았다.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삶의 지혜를 얻는 순간이었다. 때에 맞게 종종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녁 시간, 아이가

“엄마 국이 너무 짠 것 같아.”라고 말했다.

나는

“마상”이라고 했다.

아이가 웃었다.


다른 날, 남편이

“이번달 카드 값이 너무 많이 나왔어. 아껴 써야겠어.”라고 말했다.

나는

“마상”이라고 했다.

"아니 여보가 많이 썼다는게 아니라..."라며 다독였다.    

  


명절날, 친척 어른이

"살이 좀 찐 것 같네." 하면

"마상(작은 소리로)" 이라고 외쳤다.

“마상이 뭐야?”

“마음의 상처요.”

그분은 당황해했다.




할 말을 찾지 못해 묵혀두었던 감정들이 떠올랐다. 마상이라는 단어 하나를 가지게 되자,

내가 어떤 상황에서 기분 나쁘고, 상처가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내 주머니에서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는  감정카드는 마음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도구였다.



누군가 쉽게 내뱉는 말에 상처받은채 가만히 있지말고<감정 카드>를 써 보자. 미처 말하지 못해 억눌린 감정이 해소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살면서 마주하는 불편한 말들에 반응하려고 하면, 어떤 단어를 골라야 할지, 어떤 표현 방식으로 정중하게 표현할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다른 말로 바로 표현하지 못해 상처를 받는 경우가 반복된다.


그렇게 꺼내지 못한 주머니 속  말들은 얼마나 될까?


축구 경기장 위에서 선수들이 하면 안 되는 행동을 했을 때 주어지는 레드카드처럼

우리 삶의 무대에도 감정카드는 꼭 필요하다.


마상

이라는 레드카드를 꺼내

무례함을 가볍게 튕겨내자.

매거진의 이전글 처음, 지분을 요구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