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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Feb 07. 2023

사귀고 싶은 쓰레기통

그 집에 있는 물건들

집은 나만의 시선이 편집된 책이다.



우리 삶은 각자의 시선으로 선택한 것의 총합이다. 집은  수많은 가구와 물건 중 개인의 취향과 안목으로 고른 것들로 채워진다. 집은 곧 그 사람을 나타내듯, 집에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가치관과 취향을 알게 된다.          


집은 추억을 불러오기도 한다.


우리 집에 놀러 온 남편의 후배는 나무벽을 보며 어린시절, 자랐던 시골이 생각난다며 향수에 젖었고, 또 다른 친구는 방마다 있는 전신거울을 보며, 집을 나서기 전 체크할 거울이 자신의 집에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바로 구입했다. 이처럼 발견을 통해 삶이 변화되기도 한다.




나 역시, 친구의 집에 놀러 가서 우리 집에 없는 신기한 물건들을 발견했다. L의 집에는 몇 달 전 가봤지만, 그 사이에 새로운 물건들로 업데이트되었다. 못 보던 물건들이 생겼다.

점심으로 초밥을 시켜 먹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그 집의 정수기 앞에 섰다. 누구의 집에나 흔히 볼 수 있는 정수기 아닌가? 하지만 그 집 정수기는 남달랐다.


정수, 온수, 냉수 등 누르는 버튼이 미끄럼틀처럼 기울어져 나를 향해 있었다. 살짝 기울어진 각도만으로 쉽게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뒷사람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배려있는 사람을 만난듯 했다. 우리 집 정수기는 직각의 형태로 글자를 보려면 거북이처럼 목을 쭉 빼고 보아야 한다. 늘 그 상태로 지냈기에 불편한 줄도 몰랐는데, 기울어진 글자판을 보며 인간을 향한 정수기의 매너를 느낄 수 있었다.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는 말처럼 작은 차이가 감동을 불러왔다.     









감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식탁을 정리하고 휴지를 버리려는데, 쓰레기통이 서장훈처럼 컸다. 늘 보던 바닥의 휴지통이 아니었다.     


“언니 이거 뭐예요? 좋다,”

“그거 발로 버튼 누르면 뚜껑도 열리고, 아래 칸에는 쓰레기봉투 넣을 수도 있어요.”

“우와, 이런 게 있다니,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되네요. 어디서 산 거예요?”

“이케아에서 샀어요.”     


시중에 이런 제품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다가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이렇게 내가 모르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 큰 쓰레기통은 내 이상형이었다. 아래에 서랍까지 있다니, 실력까지 겸비한 쓰레기통. 사람이었으면 사귀고 싶었다.

요즘 허리디스크로 쓰레기를 버리려고 허리를 굽힐 때마다 통증이 더해지기에 키 큰 쓰레기통은 더 욕망하는 물건이었다.      



결국 물건도 사람이 만들기에 불편을 개선하는 물건들이 생겨나는 것 아닐까? 다만 그 물건들을 모르고 살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누군가의 집에 가면 우연히 알게 된다. 언니가 초대하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장면이었다. 그러고 보면 물건도 사람처럼 인연이 있는 것 같다.      









이제 숨 좀 돌리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꿀이 등장한다. 이쯤 되니 마치 물건과의 소개팅에 나온 기분이었다. L이 커피머신으로 맛있는 커피를 내려주었다. 평소 바닐라 라테를 즐겨 마시기에 시럽이 있냐고 물었더니, 시럽대신 꿀은 어떻냐며 장식장에서 꿀통을 들고 나왔다.    

  

“그게 꿀이에요?”


생김새가 주방세제나 샴푸를 닮아 있어 내 눈을 의심했다.     


 

사람이 제일 감탄할 때가 내가 가지고 있는 불편함이 개선되는 상황이다. 집에 있던 다른 물건들은 ‘뭐 예쁘네, 이런 것도 있네.’ 정도로 담담했다면 이 펌핑꿀은 머리 속에서 징이 울리는 것 같은 큰 울림을 주었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도 선물 받은 꿀이 있다. 그 꿀은 맛이 너무 좋은데 뚜껑 달린 항아리통에 들어 있어서 먹을 때마다 숟가락으로 퍼 먹어야 해서 불편했다.  혹시라도 그 넓은 통 안에 이물질이 들어갈까 걱정되기도 하고, 입구로 꿀이 흘러내려 자주 닦아낸다. 뚜껑을 열 때마다 끈적여서 손에 다 묻는다. 맛있어서 자주 먹고 싶은데, 뚜껑을 열고 꿀을 푸는 과정을 생각하면 쉽지 않다.


그랬던 내 앞에 나타난 펌핑꿀이었다.

같은 꿀을 만들면서 누군가는 과거에 머물러 있고, 누군가는 진화했다. 


만약 선물 받은 꿀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오늘 본 펌핑꿀을 샀을 것이다. 꿀이 아닌 도구가 부럽기는 처음이었다. 나도 저 펌핑도구를 가지고 싶었다.    


  

발명이란? 아직까지 없던 기술이나 물건을 새로 생각하여 만들어 내는 것을 뜻한다.      

정수기의 글자판, 키다리 쓰레기통, 펌핑 꿀 모두 발명은 아니지만 A+B의 공식처럼 다른 곳에 쓰이는 것을 접목해 새로운 물건을 만든 사례로 혁명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 처럼 느껴졌다.


뭐 사실 발명이든, 혁명이든 그 단어가 중요하진 않다.      

한마디로 반했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사람에게 반하는 일은 흔치 않다. 첫사랑이 오래 기억되는 이유도 가장 강렬한 감정을 동반하는 사람이기 때문 아닐까? 그 후에는 그렇게 반하는 사람이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살다보며 물건에게는 자주 반했다. 마음이 홀린 것처럼 자꾸 눈길이 가고 꿀통을 곁에 두고 싶어졌다.


펌핑꿀을 사랑하며,  또한 사람에게 반한 것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물건을 만든 것도 사람이니까.


반짝이는 제품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펌핑꿀을 만든 사람 누구신가요?

반했어요.


키다리 쓰레기통 만든 사람 누구신가요?

제 이상형이에요.    


첫 눈에 반하면

물건과도 사랑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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