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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Oct 09. 2020

장식용 시간들

아이가 피아노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바이엘은 가운데 건반만을 주로 사용해서 연주하는 곡이 많았다.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생각을 꺼내 놓았다. 레드 카펫처럼 펼쳐진 건반들을 바라보며 아이가 말했다.    


" 엄마, 여기 끝에 있는 건(건반들) 장식용이야. " 



의문이 아닌 확신이었다. 그동안 다양한 곡을 연주하면서 양 끝 쪽에 있는 건반들은 친 적이 없었다. 사용하지도 않는 건반들은 왜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이의 생각이 재미있기도 했고 어떤 사유를 불러왔다.     

자주 연주하는 건반과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건반.

한 곡에서 가끔 눌러지는 건반.    


그 건반들이 우리의 삶과 닮아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쓰는 물건들이 있다. 칫솔, 치약, 수건, 비누, 휴지, 컵, 그릇, 리모컨 등등……. 사용빈도수가 높아 피아노의 가운데 건반 같다. 우산, 썰매, 여행가방, 공구, 모자, 선글라스 등은 생활 속에 어쩌다 한 번 쓰인다. 계절에 가야 모습을 드러낸다. 양 끝의 건반 같다.    


날마다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아이를 키우는 나는 아침을 차리고 치우고,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를 하고 다시 저녁을 준비한다. 즐거움의 시간보다는 해내야 하는 시간들이다. 회사를 다닌다면 회사 안에서의 시간일 수 있다.     


어쩌다 여행을 가고, 어쩌다 눈썰매를 탄다고 해서 여행가방과 썰매가 안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건 생필품이 아닌 가끔 등장하는 물건일 수 있다. 평일보다는 주말, 공휴일 같은 날들이 꼭 필요하다. 가끔 영화를 보고 가끔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은 일 년의 시간 속에 터지는 폭죽  같은 시간이다. 날마다 같은 무늬의 날들이라면 단조로울 것이다.    


쭉 자리를 지키다가 캠핑 날에서야 등장하는 텐트, 맑은 날은 어둠과 친구 삼아 있다가 비가 오면 그때서야 기지개를 우산은 가끔 쓰이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다.     

아이가 실력을 쌓아 더 풍성한 곡을 연주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서야 양 끝의 건반들의 존재를 알 것이다. 그 건반들이 그저 장식용으로 놓여있었던 것은 아이 었다는 것을 말이다.

다양한 음역의 소리들을 다루면 연주가 풍성해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쩌다 하는 도전들은 피아노의 많은 건반들을 생겨나게 하는 건 아닐까? 패러글라이딩에 도전하면 내 안에‘도’ 건반이 생긴다. 길을 가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꽃 하나를 발견하면 내 안에‘레’ 건반이 생겨난다. 하나의 경험으로 나를 연주할 수 있는 스펙트럼은 더 넓어진다.


몇 개의 건반만을 가지고 연주하는 노래도 멋지다. 심플하고 편안함을 선사한다. 그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반복되는 생활이 안정적이어야 삶이 단단해지듯 말이다. 다양한 변주곡은 인생의 방향을 바꿔 주기도 하고 산뜻한 기분을 선사하기도 한다.      



일상을 살아가다가 가끔은 장식용의 시간들을 즐겨보자. 새로운 연주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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