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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Oct 09. 2020

반전의 미학

양말에 구멍이 났다. 오래된 양말이라면 버렸을 텐데 아이 엄지발가락의 빠른 성장으로 빚어진 결과였다. 양말에 난 구멍을 꿰매려고 했더니 아이가 그렇게 신는 건 싫은지 그냥 버리자고 했다. 날마다 새 장난감, 새 운동화, 새 양말이 익숙한 아이였다. 작은 구멍 하나로 버리는 건 아깝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반론을 제시했다.   



실 생각은 안 해?



양말을 꿰매면 실을 쓰게 되니 실은 아깝지 않냐 는 뜻이었다. 실의 입장까지 대변하는 아이였다. 억지라는 시선으로 보면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아이의 논리도 들어보니 맞는 이야기였다. 실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나는 양말의 입장만 생각했다. 반전이었던 아이의 말에 당황했다. 내 논리를 관철시키고자 이렇게 말했다.   

  

“실은 내내 어둠 속에 있다가 지금이 바로 바깥 활동을 할 시기라서 좋을 걸”    


내가 생각해도 훌륭한 반론은 아니었다. 아이는 그냥 넘어가 주었다. 자신의 말은 하나의 유머로 생각하는 듯했다.    

반전이란 일의 형세가 뒤바뀜을 의미한다. 판을 뒤집어 놓는 것. 예측한 상황이 아닌 뜻밖의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스포츠 등 반전이 있어야 즐겁다. 삶도 마찬가지이다. 아이의 반전의 말과 비슷한 뉘앙스를 얼마 전에 다시 만났다.     


에버랜드를 찾았다. 갈색 사자와 백호, 황호, 한국호랑이, 하이에나와 불곰 등 맹수들을 볼 수 있는 사파리 월드에 갔다.

투어 버스를 타고 차 안에서 맹수들을 차례대로 볼 수 있었다. 중간중간 운전을 하시던 가이드 분이 동물들의 특징을 설명해 주었다. 귀 기울여 듣다가 마지막마다 웃음을 선사하는 특유의 화법을 발견했다. 이런 식이었다.    


“오른쪽에 사자들이 모여 있는 곳 보이시죠. 이곳이 사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곳이에요. 왜 좋아할까요? 저쪽 사자들 반대편에 초식동물들 보이죠?

…….

지금 아이쇼핑 중이에요.”    

“자, 펠리컨 뒤에 둘 발로 서 있는 동물 보이시나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 동물을 찾는다)    

우리 사육사 두 명이예요. 잡식이에요. 아무거나 잘 먹어요.”    

“이 뱅갈 호랑이는 지금 이렇게 누워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3m을 뛸 수 있어요. 우리 버스를 뛰어넘을 수 있어요.     

그런데 마음을 안 먹어요.”       

“왼쪽에는 흑곰이에요. (등지고 자고 있어 뒷모습만 보였다) 흑돼지 아니에요.”    

“이번에는 어린 곰을 볼 거예요.

(기대에 부풀어 있는데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뒤 곰이 나타났다. 덩치가 커서 놀라는 순간 설명이 이어진다.)

…….

제가 어리다고 했지 귀엽다고는 안 했어요.”      



가이드는 밋밋한 설명 뒤 위트를 더하기도 했고 평범한 설명 뒤 예상하지 못한 반전을 선사했다. 동물들은 그대로였는데 가이드의 설명으로 인해 맹수들의 머리에 저마다의 말풍선이 하나씩 생겨났다. 만화 같은 시간이었다.     

후룸라이드라는 놀이기구는 배를 타고 평지를 가다가 갑자기 폭포처럼 떨어지면서 ‘붕’ 뜨는 기분을 느끼는 놀이기구이다. 반전을 체험하기 위해 타는 것이다. 반전은 스릴의 가져다준다. 사파리 월드투어는 기대하지 않았던 설명으로 인해 감정이 놀이기구를 탄 듯 쫄깃한 시간이었다.    


반전은 말에도 존재하지만 공간에서도 존재했다. 경주면 경주, 대구면 대구 한 장소를 여행할 때 대부분 큰길 중심에서 둘러보고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의 ‘김광석 거리’에서 길을 잃어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마치 아무도 모르는 세계에 들어선 것처럼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큰 길가의 화려한 조명과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 시끄러운 음악소리들이 사라졌다. 인적이 드물어 조용했고 느슨하게 존재하는 가게들은 고유의 색으로 무장한 장인 같았다.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은 패브릭 가게, 밖에서 바라만 보아도 아련한 꽃가게, 무심하게 툭툭 얹어 놓은 외국 잡지가 가득했던 카페까지…….


저마다의 스토리와 멋이 있는 가게들이 주택 사이사이에 초코 칩처럼 콕콕 놓여 있었다.     

큰 도로에는 큰 브랜드의 가게들이 많았다. 다른 도시에서도 볼 수 있는 가게들이었다. 눈에 띄고 자극적인 광고들이 많았다. 관광지 어느 곳에 가나 메인 거리에는 정형화된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골목 안은 큰 도로보다 자기만의 목소리를 가진 작은 가게들이 많았다. 저마다의 취향을 파는 것 같았다.     


잘못 길을 들어선 탓에 알게 된 사실로 그 후 여행의 풍경은 많이 바뀌었다. 여행지의 반전을 찾아 나섰다. 시큰둥했던 골목이 주인공이 되었다. 스치지 않고 그 안을 걷고 들여다보았다. 골목 예찬가가 되었다. 꼭 가게와 카페가 아니더라도 주택마다 보여주는 문, 벽돌담, 식물 등 일상을 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빨래 줄 위에서 곡예하는 치마와 티셔츠를 보기도 하고 장독대의 그을린 피부를 엿보았다. 우연히 마주치는 고양이와 강아지는 그 동네의 마스코트 같기도 했다. 집마다 피는 꽃과 나무들을 보며 그 안에는 어떤 정원사들이 살고 있나 상상하기도 했다. 집집마다 다른 계단의 색들은 팬톤의 컬러칩 같기도 했다. 툭툭 놓여있던 의자들은 빈티지 가게를 연상케 했다. 우리 동네가 아닌 낯선 동네의 골목길을 익숙하지만 새로운 곳이었다.     


골목은 의도하지 않은 선물처럼 다가왔고 그 즐거움을 안 이후로는 공간의 반전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반전은 찾을수록 멀리 달아나는 법.


마음을 비우고 아무 생각 없이 다녀야 어느 날 ‘짠’ 하고 나타났다.     

그러면 무지개를 본 듯 그때부터 즐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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