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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Dec 20. 2021

싫증에 대한 입장

햐얀 얼음 언덕 위에는 노란 보름달이 숭덩숭덩 잘려 있다. 여름이면 망고 빙수를 먹고 싶어 호텔을 찾았다.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내 앞으로 가득했고, 두 시간을 기다려 들어갔다. 달콤한 망고과육이 입안에서 넘쳐흐르는 행복은 여름에 만날 수 있는 기쁨이었다. 조각조각 작아서 입에서 잠깐 스치는 망고가 아니라 큰 덩어리의 망고는 입안을 가득 메워 오래 머물러서 좋았다.


겨울의 초입. 망고 빙수는 자취를 감췄다.


망고 빙수를 맛볼 수는 없었지만,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트리는 호텔에 어떻게 장식되어 있는지, 곳곳에 어떤 작가들의 그림들이 걸려 있는지 궁금했다. 연말의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도심 속 호텔 카페를 찾았다. 겨울이었기에 딸기 빙수를 선보이고 있었다. 어차피 빙수를 먹으려고 간 것이 아니었기에 상관없었다. 가족과 곳곳에 놓인 빨강의 조각품 앞에서 사진도 찍고 천장에 매달린 모빌의 의미를 상상하며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화장실에서 흘러 나오는 클래식덕분에 낭만에 젖어 들었다.


잠시 후, 하얀색 얼음산 안에 빨강 전구 같은 딸기가 콕콕 박혀 있는 빙수가 등장했다.


딸기 위에 눈이 내린 듯한 슈가 파우더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각자의 숟가락은 삽이 되어 하얀 산으로 돌진했다. 사실 딸기는 집에서 늘 먹던 과일이어서 망고만큼의 감흥은 없었다. 하지만 함께 곁들여 먹는 딸기 초콜릿과 말캉한 치즈, 딸기 푸딩의 맛이 새로워 흥을 끌어 올렸다. 이대로 실망해선 안되었다.


딸기 옆의 딸기였고, 딸기 아래 딸기, 딸기 위에도 딸기였다.



맛있었지만 먹다 보니 슬슬 물리기 시작했다. 딱 맛있게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빙수인지라 그럴 수도 없었다. 딸기의 당도가 떨어져서 였을까? 그냥 아무생각 없이 와구와구 먹어야 할 상황인데 고민의 시간이 길어졌다. 이름이 딸기 빙수여도 그 안에 딸기 친구가 있어도 괜찮고 딸기 친척, 딸기 직장상사가 있어도 좋았을 텐데, 온통 딸기뿐인 구성이 아쉬웠다. 다른 과일(배, 감, 귤, 블루베리, 포도)이 조금 놓여도 좋을 것 같았고, 초콜릿도 꼭 딸기 초콜릿이 아니어도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초등학교 때, 엄마가 해 준 반찬 중에 오징어 볶음이 너무 맛있다고 했다. 그 후 식탁에 오징어 볶음은 2~3일에 한 번꼴로 등장했다. 너무 자주 먹는 바람에 좋아했던 음식이 싫증났다. 이런 패턴은 이상하게 자주 반복되었다. 인절미 떡이 맛있다고 하면 자주 인절미가 있었고, 팬케이크가 맛있다고 한 날부터는 온 집안에 달큼한 향기가 가득했다. 언제부터인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학창 시절의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행동이 내가 엄마가 되어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아이가 학교에서 곤드레밥이 나왔는데 너무 맛있다고 해달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신나게 준비했고 간장 양념에 비벼 맛있는 한 끼를 먹었다. 나도 오랜만에 먹은 곤드레밥이어서 반했다. 그 후 몇 번을 더 곤드레밥을 해 먹었다. 계속 맛있게 먹는 나와는 다르게 아이는 어린 시절의 나처럼 곤드레밥에 더는 손을 대지 않았다.      


“엄마, 너무 자주 먹는 거 아니야? 나 곤드레밥 그만 먹고 싶어.”

“네가 맛있다길래…….”     


다른 날은 식당에서 콩자반을 잘 먹길래 검은콩을 한 솥 끓여 반찬을 만들었는데, 식당에서 먹은 것처럼 잘 먹지 않았다. 술래잡기처럼 아이의 입맛을 잡기 어려웠다. 엄마가 되고 보니, 아이가 어떤 음식을 잘 먹으면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고, 나에게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요리를 해야 아이가 좋아할지  잘 모르겠는 날들이 많았다. 안갯속을 걷는 날 중에, 잘 먹는 모습을 발견하면 신이 났다. 드디어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걸 주고 싶은 마음. 그 마음으로 반찬을 만드는 것이었다.      

어릴 때는 이런 엄마의 마음을 몰랐다. 왜 같은 반찬을 며칠 동안 주냐고 투정만 부렸다. 좋아하는 음식을 질리게 하는 건 엄마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서 멀어져 엄마가 되고 보니, 그건 사랑이었다. 내가 투정 부리던 순간에 엄마는 내가 잘 먹는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더 주고 싶어 날마다 요리를 한 거였다.


지금 아이의 반응을 보며 생각한다.      

‘맞다. 나도 그때 같은 반찬이 연속으로 나오면 싫어했지. 한 번 먹었으면 적어도 일주일 뒤에 주길 바랐고, 질리도록 많은 양보다는 먹을 만큼, 아쉬울 만큼 적게 주는게 맛있었어….’     


아이였던 나를 떠올려 내 아이의 마음을 읽는다. 열심히 만든 콩자반을 먹지 않아 서운했던 마음을 바람에 실려 보낸다. 그때의 엄마가 아이였던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 앞에 놓여 있는 딸기빙수를 보며 생각한다.


셰프님이 손님의 마음을 조금만 읽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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