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하연 Apr 18. 2022

망한 머리가 내게 알려 준 것

평소에 즐겨보는 유튜브가 있다. 여기서 주로 다루는 콘텐츠는 다른 헤어숍에서 망친 머리를 하고 온 손님들에게 원래의 헤어스타일로 복구하거나, 더 나은 헤어스타일로 변신해 주는 것이다. 앞머리에 헤어 롤빗이 말려서 뺄 수 없는 사람, 머리의 층을 너무 많이 내서 문어 같은 헤어 스타일의 사람, 염색이 뒤죽박죽 된 사람도 찾아왔다. 헤어디자이너 기우쌤(유투브명)의 손을 거치면 망가진 머리는 예쁜 머리가 되었다. 의사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듯 헤어스타일로 인한 고통의 삶을 구했다. 가끔은 망한 머리가 너무 우스꽝스러워 웃음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그 콘텐츠를 보며 웃을 수 없었다.


평소 미용실 가는 것을 꺼려한다. 한 번 가면 4시간씩 앉아 파마를 하는 것이 힘들었다. 헤어스타일이 바뀌는 즐거움보다 한 자리에 앉아 기계를 머리에 꽂고 기다려다 하는 지루함이 더 컸다. 미루다가 거의 반년만에 미용실을 찾았다. 이 동네로 이사 오면서 두 번을 방문한 곳이었다. 그때마다 마음에 들었기에 다시 방문했다. 그런데 이번에 내 머리를 담당한 사람은 다른 디자이너였다.


"어떤 스타일의 머리를 하실 거예요?"

"펌을 하려고 하는데요. 너무 금방 풀리지는 않게 하고 싶어요."

"혹시 원하시는 헤어스타일의 사진 있으세요?"

"사진 안 가져왔어요." 


사진을 가져가도 그대로 된 적이 없었기에 사진은 무용하다고 여겼다. 디자이너가 전문가이니까 알아서 예쁘게 해 주겠지라고 생각했다. (내게는 파마를 했을 때의 굽실한 컬의 이미지가 있었다. )


"머리숱이 많으시고 층도 없어서 파마를 하면 너무 부해질 것 같아요."

"층을 만드시는 건 어떠세요?"

"전 머리에 층 내는 게 싫어서요."

"그래도 숱이 많으신데..."


뭔가 시작이 찝찝했다. 난 늘 숱이 많았지만 펌을 하면 예쁜 웨이브가 나왔다. 그런데 자꾸 이런 머리는 힘들것 같다는 뉘앙스를 풍겨 이상했다.


"모발 상태를 보니까 디지털 파마보다는 그냥 펌이 나으실 것 같아요."

"네"


믿었다. 3시간 흐르고 샴푸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거울 속에 내 얼굴에는 젖은 라면이 붙어있었다. 너무 꼬불꼬불했다. 드라이를 하면 풀리겠지, 스타일이 나오겠지.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드라이를 할수록 머리가 부풀어 올랐다. 미역이 부는 과정과 흡사했다. 거울 속에는 색소폰을 부르는 티니지가 앉아 있었다. 살면서 이런 빠끌빠글한 머리는 처음이었다. 너무 당혹스러웠지만, 마스크로 가려진 입 때문에 그 디자이너는 눈치채지 못했다. 다른 직원들도 내 모습을 보고 당황했던지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컬이 진짜 잘 나왔다."

"너무 귀여우세요. 공효진 같아요."


'20년은 더 늙어 보이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현실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아니 파악하고 싶지 않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 집에 가서 다시 스타일링을 하면 나아지겠지.'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나왔다.


엘리베이터의 거울로 머리를 한 번 보고, 거리에 세워진 차의 유리창으로 한 번 더 보았다. 앞머리까지 뽀글거려서 70년대의 드라마 주인공 같았다. 갑자기 자신감이 바닥에 떨어져 꽃잎처럼 나뒹굴었다. 고개를 처박고 집까지 빠른 걸음으로 갔다. 집 안의 커다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졌지만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예쁘게 변신할 것을 기대하고 갔는데, 실망만 안고 돌아왔다. 망한 머리였다. 불쾌하고, 못마땅한 감정을 느끼려고 16만 원을 지불한 게 아니었다. 앞머리에 실핀을 꼽고, 뒤 머리도 질끈 묶었다. 그동안 파마를 하고 왔을 때, 어색해서 조금 마음에 안 드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렇게 망한 머리는 처음이었다.


다시 찾아가야 하나?

다른 미용실에 가서 단발로 자르고 다시 펌을 해야 할까? 그럼 머리가 너무 망가질 텐데...

수많은 감정이 밀려왔다.


그렇게 하루 밤이 흘렀고, 감정이 가라앉자, 어제의 일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 디자이너와 나 사이에 사진 한 장만 있었다면 이 상황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가져가는 샘플사진은 꼭 연예인의 머리처럼 똑같이 만들어달라는 요청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역할이 있었다. 망한 머리가 나오지 않도록 도와주는 보험이었다. 그 사진 한 장이 없으니, 서로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없었다. 결국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




미용실에서의 사진은 소통의 도구였다.




이 사실을 망한 머리를 하고서야 깨달았다. 사진 한 장 있었더라면, 제가 말한 스타일과는 너무 다른대요.라고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사진을 가져가지 않은 것도 아쉽고, 이렇게 나이 들게 만들어 놓은 그분의 실력도 아쉽다. 하지만 실패는 꼭 실패로 끝나지 않듯 다음부터는 꼭 미용실에 갈 때에는 사진 한 장을 준비해야 겠다는 걸 배웠다. 더불어 기우쌤의 망한 머리채널에 등장하는 손님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은 그 채널을 보고 웃을 수 없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모두에게 머리는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