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은밀한 점과 흉터가 있다. 여권번호, 주민번호처럼 점은 그 사람의 고유한아이덴티티가 된다.
아이가 태어나고 돌이 되기 전, 쿠션 같은 발바닥의 점을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왼쪽 발바닥 엄지 쪽에 가까운 고동색 점"
"오른쪽 허벅지 안 쪽에 백두산 같은 흐릿한 세모점"
혹시라도 아이를 잃어버린다면?이라는 가정으로 눈은 몸 이리저리를 훑었다. 보험을 들듯 아이 몸의 흉터들을 저장했다. 그 점이 내 아이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라고 믿었다.
이 모든 불안은 죠리퐁 때문이었다. 과자의 뒷면에 실린 미아 찾기 사진들을 보면 늘 그 아이들이 내 아이 같았다.
도로 곳곳에 놓인
"송혜희를 찾습니다"라는 현수막은 내 일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볼 때마다 내 아이를 잃었다. 점을 보면 슬픈기분이 연결되었다. 점을 보며 예쁘고 귀여운 감정보다는 아이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이상한 기분이 생겨났다. 그런 감정은 엄마가 되어서 생긴 감정이었다.
잃을 것이 없던(아이가 없을 때)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던 감정이었다.점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어느 날 간식을 먹는데 아이 허벅지에 싸인펜이 묻은 것 같았다.
"예린아 이리 와봐. 거기 뭐 묻었어. "
"아~~ 이거? 내가 그린 거야~~"
"그린 거라고?"
"응. 그렸어. 재밌잖아."
10살의 호기심은 발꼬락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왔다. 도화지가 아닌 자기 몸에 그림을 그리다니...아이는 타투를 알리 없지만 타투 같기도 했다. 자기 몸을 유심히 관찰해서 그린과정을 상상하게 했다.
나에겐 슬픔의 정서인 점이 아이로 인해 놀이의 시작이 되었다.
ㅡ엄마도 그려볼래.
아이 몸의 점과 그 아래의 흐릿한 상처를 연결해 수박을 그렸다.
어느 것이 점이고 어느 것이 그린 수박씨인지 헷갈렸다.
아이가 또 다른 점을 찾아 나선다. 다른 쪽 다리에서 발견한 붉은 점은 꼬마로 태어났다.
충혈된 눈을 가진 소녀였다. 느닷없는 점(헤)프닝에 창작의 기분도 만끽하고 점의 활용도 새롭게 익히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서로의몸에 점을 찾기 시작했다.
ㅡ엄마 목에 톡 튀어나온 점 있네.
ㅡ이 쪽 팔에 점 다섯 개나 있어.
몰랐던 내 몸의 좌표를 알아갔다. 한 번도 관심을 기울여 본 적 없는 대상을 바라본다.
점은 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스팔트에도 검은 점들이 있다.
껌
런던 밀레니엄브릿지에는 알록달록한 껌이 수놓아 있다. 거리의 말썽꾸러기로 여겨지는 껌에게 다정한 손을 건네는아티스트가 있다.
Ben wilson이다. 그는 영국의 껌 페인팅 아티스트로 10년간 껌 위에 그림을 그렸다
출처. 윤현상재블로그
손바닥보다 작은 껌이 그의 캔버스이다. 누워있는 작품을 위해 그의 몸도 뉘인다. 스스로가 껌이 된다. 섬세한 붓으로 자기만의 메시지를 담고 이야기를 만든다.
출처ㅡ윤현상재블로그
제각각 다르게 붙어있는 유연한 껌의 형태에 맞는 디자인을 한다. 날마다 작업은 새롭고 새롭다. 어떤 껌을 만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