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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Sep 26. 2022

회오리 감자처럼 사는 법

건강한 자기표현은 어린시절 어른으로부터 수용받은 경험에 의해 길러진다.



어린 시절부터 술을 자주 마셨던 아빠를 설득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술이 건강에 좋지 않은 이유부터, 아빠의 음주가 가족들에겐 두려움이라는 것, 또 어떤 날은 아빠의 고단한 삶을 공감하며 변화하기를 바랐다. 평소 말이 없는 아빠는 내 말이면 귀 기울여 들었지만,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늘 그대로였다.      


나는 절망했다.


벽은 넘어져 길이 되길 바랐지만 벽은 꿈쩍하지 않았고, 두꺼워질 뿐이었다. 중, 고등학교를 지나며 나도 지쳐갔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 아빠였다. 그건 벽이 생기는 일을 넘어 나를 굳게 만들었다. 아빠와의 경험은 ‘세상은 내가 무엇을 이야기해도 바뀌지 않는구나.’라는 끔찍한 신념을 갖게 했다.      


나의 반쪽 엄마는 나의 이야기에 경청하고 다 들어주는 사람이었지만, 좋은 경험만 내게 쌓이는 것이 아니었다. 아빠와의 관계도 똑같이 내게 흘러 들어왔다.      

수많은 매체는 한 어른으로서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때의 무력감은 생활 전반에 스며들어 비슷한 상황이 주어지면 아무것도 못하게 했다.


백화점에서 산 물건을 환불하는 것도 어려웠고, 일적으로나 친구관계에서나 해야 하는 말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개선되어야 하는 점이나 불편함을 말하는 일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그런 내가 엄마가 되었다. 내 어린 시절의 결핍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부단히 애를 썼다.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물론 100% 다 들어주지는 못했다. 가령 긴 생머리의 아이가 파마를 하고 싶다고 해서 큰마음먹고 파마를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단발로 잘라달라고 할 때라던가,

제페토 안에서 친구들에게 선물을 한다며 5만 원 이상의 머니를 결재해 달라는 것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이에 따른 경제관념에 어긋나는 것들은 들어줄 수 없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선 안에서 아이의 요구들을 들어주었다.



   

아이의 귀여운 요구들은 이런 것이었다.


     

늘 방에서만 자는 건 너무 지겨워. 오늘은 주방에서 자면 안 돼?

돼지. 이불 어디다가 필래?     





나 서서 오줌 싸고 싶은데 한 번 해봐도 돼?

응. 샤워할 때 한 번 해봐. 그리고 후에 꼭 깨끗이 씻어야 해.     






나 눈 가리고 블루베리 먹어도 돼?

-그럼. 안대 서랍에 있을걸.     





마이쮸로 실 솜사탕을 만들 수 있대. 해봐도 돼?

그게 된다고? 어떻게 하는 건대?     






카펫에 줄은 몇 개일까?

한 번 세봐.

198개야.     







얼음이 녹는데 몇 초가 걸릴까?

재보면 되지.

3분 10초 걸려. 마이쮸는 얼마나 걸릴까?

1분 3초

죠리퐁 한 알은?

5초     







손가락으로 비눗방울을 만들 수 있대.     






실내화 거꾸로 신어보면 어떤 느낌일까?






바지 하나에만 발을 넣고 싶어. 등등





다 들어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열심히 호응했던 이유는 부모와 소통하는 아이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동시에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세상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 불편한 감정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아이의 말을 듣고 반응하는 것은 중요하다. 커가면서 불통과 소통의 갈림길에서 소통을 택하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이 받아들여지면, 스스로 가치 있다고 여기고 반대의견에도 상처받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건강한 소통의 태도를 지니게 된다.




이런 생각은 다른 아이를 통해서도 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 하원 시간에 폴리스 활동을 했다. 하굣길 얌체공처럼 통통통 뛰어오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초록불의 신호등을 기다리는 동안, 오늘 급식은 맛있었는지 물었다. 통통한 아이들은 대부분 맛있었다고 말하고, 조금 마른 친구들은 별로 맛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한 그룹이 횡단보고를 건너가고 한 그룹이 몰려왔다.



"애들아, 학교 급식 맛있어?"

두 아이가 동시에 다른 답변을 했다.      

“급식 다 맛있어요.”

“별로예요. 맛없어요.”

맛없다고 말한 아이가 멋쩍었는지

“이 친구는 편식 없이 잘 먹는데, 저는 편식을 하거든요. 그래서 급식이 별로 맛이 없더라고요.”

“그래도 스스로 편식하는 걸 잘 알고 있다는 게 놀라운데. 멋지다.”

급식이 맛없다는 아이를 향해

“그럼 그동안 나온 급식 중에 어떤 게 제일 맛있었어?”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며

“지난번에 회오리감자가 나왔거든요. 너무 맛있어서 행복했어요.”

“급식에 회오리 감자가 나왔어? 인기 많았겠다”

“근데요. 그거, 제가 건의함에 써서 나온거예요. 맨날 맨날 회오리 감자를 적어 넣었더니, 나오더라고요.”

“건의함에 적은 게 받아들여졌구나. 좋다. 다음에도 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그렇게 계속 건의함에 적어 넣어봐.”

“네.”     


우리의 짧은 신호등 대화가 끝이 났고, 아이들은 무리 지어 건너편으로 달려갔다.

그 후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그 학생의 표정과 말이 계속 떠올랐다. 본인이 먹고 싶다던 회오리감자가 정말 급식에 나온 날. 얼마나 기뻤을까? 회오리감자도 꿀맛이었겠지만, 내가 쓰면 급식에 나오기도 하네.라는 경험이 더 맛있었을 것이다.



계속 의견을 말하면, 언젠가는 받아들여진다는  경험. 11살의 그 경험은 아이를 어디로 데려갈까?

어른이 되어서 역경과 고난을 만나더라도, 자기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것이다.



 회오리 감자처럼 돌진하는 행동은 어린 시절 어른으로 수용받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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