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술.여 -1. 옥희배상 -1 -4

엘살바도르 붉은저녁 개정판

by 이규만

그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내 것을 만지던 손을 들어 보였다. 나는 놀라 움찔하고 말았다. 며칠 전과 달리 만졌던 느낌이 다른 건가. 표정만으로 봐서 전혀 알 수 없었다. 속을 만졌던 손은 온통 피로 범벅되어 시뻘겋다. 검붉기까지 색채를 띄웠다. 마냥 신기하게 그걸 바라보는 거 같더니 이내 표정이 찌그러졌다. 나를 세게 밀쳐냈다. 소파 밑으로 나뒹굴었다. 고개를 들어 비참한 꼴로 엉클어진 머릿결을 추스르며 그를 쳐다봤다.

“너 술에다 약 탔어?”

바로 전과 상황이 달라졌다. 가슴을 가린 채 두려움에 벌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 기운이 서서히 오는 것을 몸으로 느낀 모양이었다. 약물이 타 있는 줄 알았으면서도 그는 피 묻은 손으로 잔에 술을 따르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성에 안 찼는지 아예 병째 나발을 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술병이 벽으로 날아가 산산이 부서졌다. 순식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악-

방 밖으로 뛰쳐나가 구해 달라 소리치고 싶었다. 그 엄청난 공포는 상상외로 휘감아 돌았다. 반 나신으로 바닥에 바짝 엎드렸지만, 몸은 뜻대로 듣지 않고 벌벌 떨렸다. 남자가 나를 무자비하게 팰 것 같았다. 겁이 나 남자를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고개까지 푹 수그렸다. 모진 발길과 거친 주먹이 날라 올 것이다. 그러다 강제로 몸을 범하려 들 것이다. 맞은 아픔과 억지로 이물감으로 받아들이는 고통을 상상하자 몸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약을 탄 술은 남자가 먹었는데 오히려 내가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두려워서 울음마저 터져 나왔다. 막 울고 또 울고 실컷 울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 미동도 없이 조용했다. 방안에 온통 내 울음소리만이 존재하고 다음에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상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눈을 감은 채 쓰러져 있었다. 언제 약발이 오를지 초조해하고 있었는데 급기야 효력이 나타난 거였다. 약이 센가 보다. 그는 소파에 기대어 아예 기력조차 없는 모습이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도대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금쯤 옥희 언니가 방안을 들여 본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분명히 잘했다고는 하지 않을 거다. 길길이 날뛰며 나에게 욕을 하겠지. 그리고 남자애들을 시켜 날 무참히 짓밟아 놓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이런 상황은 일하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다. 영수 오빠 말처럼 두들겨 맞고 쓰러져 있으려나.

소리치며 달려들던 남자가 지금은 얌전하게 잔다. 꼭 죽은 거 같다. 깨어나기 전에 없어지고 싶다. 부디 이 남자가 깨어나 나를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을 벌여도 크게 벌렸구나. 이 개망나니 깨어나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옷이나 주워 입어. 보기 골상 사납다.”

옥희 언니가 들이닥쳤다. 영수 오빠가 옆에 섰다. 그는 완전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몰매를 맞았는지 입가에 피멍이 들었다. 언니는 모든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고해바친 모양이었다. 야속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 옥희 언니가 일을 수습하는 데 더 나을 수도 있으니 외려 잘된 일인지 몰랐다.

언니는 쓰러진 남자가 있는 소파 반대편에 앉아서는 탁자 위에 담배를 쥐었다. 담배를 물자 길게 연기가 코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멍하니 있는 내게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해? 왜 그러고 있어? 옷 입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 동안 영수 오빠한테로 계속 눈이 갔다. 측은하게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촉촉하게 젖어 형광등 불빛에 반짝거렸다. 오빠 다 예상했던 거잖아.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날 바라보지 말라고. 어차피 오빠나 나나 이제 끝이라고. 끝.

내가 옷을 다 챙겨 입자마자 언니는 남자애들을 불렀다. 쓰러진 그 남자를 다른 방으로 옮기게 하고 깨끗하게 방을 치우게 했다. 윤서. 내 방으로 와. 할 이야기가 있다. 뭘까. 할 이야기라는 것이. 이미 예상했던 것이 아니던가. 내 운명을 짐짓 모았다가 탕감해 버린 찰나였다. 정이 언니처럼. 레이처럼.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애들이 다 그렇고 그렇지. 미안하다. 네가 나가고 싶어 할 때 미리 손 써야 하는데 그렇게 해주지를 못해서. 정말 나가고 싶은 게냐?”

눈물이 흘러나와서 말은 하지 못하고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전에 더욱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막 쏟아져 내렸다.

“그만 울어. 이년아. 초상났니? 울고 짜고 지랄이니?”

차라리 저렇게 욕을 해주는 것이 외려 언니다웠다. 좀 전에 홀 안에서의 언니의 모습은 언니답지 않아 계속 눈치만 봤다. 그 남자가 깨어나면 만나보고 천백 배로 사과하고 용서를 빌게. 무릎 꿇고. 그만둬. 언니가 다 알아서 한다고. 이 옥희가 말이야.

“그렇게까지 과잉 반응할 필요 없어. 술집에 와서 그렇게 여자 가지고 놀았으면 됐지. 뭘 더 원해? 널 찾으면 약을 쓴 계기로 그만둬라. 했다. 말해볼게. 시끄럽게 할 필요 없어.”

“빚은?”

“알잖아. 네가 애들한테 행여 부질없는 말실수 할까 봐, 버릇처럼 단속시킨 거였고 아무것도 계산할 거 없어. 네가 안쓰러워하는 말이야.”

울먹거리다 옥희 언니를 야속하게 바라봤다. 진작 내보내 주지. 몸이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순순히 놔주는 것이 아무래도 불안했다.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것 아닐까. 언니가 담배를 빡빡 피우니까 연기가 자욱하게 흩어졌다.

“부탁하는데 지난번에 내가 한 말은 잊어라. 그리고 병원에는 꼭 가봐. 영수가 많이 걱정하더라. 돈 아끼려고 악착 떨지 말고.”

언니 말에 울컥해서 눈물이 더 났다. 인생 뭐 있어? 갈 데까지 가는 거야. 언니가 그랬잖아. 몸으로 버티라고. 그리고 싫어. 병원은 가지 않을 거야. 그렇게 힘들게 악착같이 번 돈을 병원에 다 갖다 바치라고? 내게, 있는 것이 뭐 있겠어? 남아있는 것은 돈뿐인데. 그래도 그게 날 여기까지 버티게 해 준 거야. 온갖 남자들의 무분별하고 추잡한 배설을 받으면서도 힘들다 내색하지 않고 견디게 해 준 돈. 그래. 돈이라도 있어 다행이야.


그만두는 여자는 여럿 보아 왔었다. 정작 그만둘 즈음에는 끝이 좋았던 애는 보지 못했다. 아는 듯 모르는 듯 사라졌다. 그 이후 한동안 잠잠했다. 가게에 있는 어느 여자도 입을 놀리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평소와 다름없이 우르르 손님이 몰려오고 문을 열 때마다 왁자지껄 무르익은 분위기에서 갖가지 교성이 방마다 가득 넘쳐났다. 없어진 여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찾지 않았다. 그것이 제일 신기했다. 낯이 익었던 이들이었고 분명히 같이 방에 들어왔었는데 다음 날 보면 출근을 안 하고 내뺐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와 상종이 없던 이들이야 그냥 그런가 보다 넘길 수 있었지만 나와 한동안은 가깝게 지냈던 이들이 안 보일 때는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매번 여기 여자들이 그토록 소망으로 바라고 떠들었던 일이 그대로 이루어졌는지 모를 일이다. 대범한 남자가 찾아와 빚을 청산해 주고 데리고 나갔나. 정이 언니가 그랬고 그 사람 다음으로 레이가 그랬다. 나는 많이 허전해하면서 처음 일하러 온 몇몇 여자애들한테 말하고 싶었다. 원래 이곳 분위기가 이러지 않았어. 그런데 말을 건넬 여자애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저마다 나를 대하는 눈초리가 달랐다. 슬슬 피하는 쪽이었다. 특히 정이 언니가 종적을 감추었을 때는 당분간은 그대로 지냈다. 옥희 언니의 말뿐이 들리지 않았다. 정이는 옥희의 오른팔이다. 곧 정이 말이 내 말이야. 말 잘 들어야 한다. 그리고 손님 앞에서 늘 정 마담으로 불리던 정이 언니였는데.

이곳은 전과 다름없이 술을 팔고 웃음을 팔고 헤픈 여자의 몸을 팔면서 일상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나는 그중에 하나였다. 쓰디쓰고 아픔이 몇 배나 이를 텐데. 계속 참고 있는 건가. 누구 하나 나처럼 소리 내어 신음하는 여자가 없었다. 나만 그런 건가. 옥희 언니한테 매번 소리치고 힘들다, 힘들다. 똑같이 이야기하기는 하는데 나처럼 무시당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추측하건대 항상 개별로 만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 거다.

전 양은? 김 양은? 옥희 언니는 툭툭 던졌다. 또 너니? 정말 지겨워 죽겠어.

거짓말 같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푹푹 습기를 품은 시멘트 냄새가 가시질 않은 반지하 단칸방에서 거지같이 그렇게 며칠을 보내도 찾아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뒤일까. 그리 친하지는 않았어도 간혹 나와 안면이 있던 여자애가 술에 취한 채 몸을 이기지 못하여 힘들게 뒤척이다가 같이 자고 다음 날 갔던 것이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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