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술-여 1. 옥희배상 속 액자소설

지혜이야기 2 -비

by 이규만

그때부터 내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내 몸을 무참히도 짓밟은, 그를 찾기 위한 눈물겨운 고행의 시작이었다. 학교는 휴학계를 냈고, 혼자 있는 원룸에 엄마가 찾아와도 숨기기에 급급했다. 엄마는 귀신같았다.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내 표정을 금방 읽어내고 찰거머리같이 나를 쫓아다녔다. 너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워? 먼일 났어? 말해봐. 말해보라니까. 남자 생겼니? 남자랑 무슨 일 난 거지? 그렇지?

엄마 등쌀에 못 이겨낼 것 같았다. 내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대꾸도 하지 않자, 엄마는 이내 이차 전을 준비할 태세였다. 너 말 안 하면 아빠한테 전화한다. 아빠까지 알게 되면 어찌 되는 줄 알지? 아빠 성격 네가 더 알잖아. 그래도 나는 별반 표정 없이 엄마를 쳐다봤다. 아빠한테 전화하려면 해. 상관없으니까.

경찰서에 신고하려고 벼르고 벼르다 관뒀다. 경찰은 확실한 정황이나 증거가 없으면 사람만 붙들어 놓고 계속 늘어질 것이 뻔했다. 더군다나 내가 당한 모든 일을 다 남자들 앞에서 밝혀야 하는데 그걸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수치심이 발목을 잡았다.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내 몸에 남아있는 정액만으로 DNA 유전자 검사를 해서 범인을 잡을 수 있다고 하는데, 아차 싶었다. 병원을 다녀온 뒤 약사에게 사후 피임약을 처방받아 약을 먹고 그 치욕스러운 일을 지우려고 수없이 씻어낸 뒤였다. 그랬다면 산부인과 쳐 죽일 의사 그년이 먼저 유전자 이야기를 하고 정액을 내 몸에서 검출했어야 했다. 내 몸을 이리저리 만져가며 겁박을 한 것이 그년이었다. 아무리 이야기한다 한들 동조해 줄 리가 없었다. 너도 당했구나, 여자애가 처신을 어떻게 하고 다녔기에. 조신하지 못하고선. 어림짐작한 사회통념으로 바라보고 동정 어린 시선으로 날 비웃을 뿐이었다. 개 같은 년. 날 짓밟은 남자 새끼보다 산부인과에 있는 네년이 더 나빠.

그날. 약국에서 사후 피임약을 여자 약사에게 얻어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병원 의사 처방전이 없으면 약을 내줄 수 없어요. 절대 안 됩니다. 그녀 앞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관계한 지 얼마나 됐죠? 겨우 모기만 한 소리로 떠듬떠듬 말해줬다. 아마 세 시간 전쯤일 거예요. 새벽이었거든요. 밖에서? 나는 창피했지만,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 술 냄새 많이 나네요. 아직 술이 안 깬 것 같지만 그래도 잘 찾아오셨어요. 그녀가 처량하고 불쌍한 여자의 모습으로 봐줘서 그대로 약을 처방해 줄 줄 알았다. 그렇지만, 아니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의사 처방전이 필요해요. 시간 늦기 전에 얼른 병원부터 가세요. 이대로 시간 끌다간 위험해져요. 사후 피임약이 72시간 내이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산부인과 병원 주소랑 의사 이름까지 적어줬다. 한 번 더 버텨봤다. 그러니까 저는요. 말씀하신 것처럼 빨리 약을 먹었으면 좋겠다니까요. 약사는 내 손을 잡았다. 약국 밖으로까지 나와 날 배웅했다. 적어준 것을 보여주면 의사가 묻지도 않고 진료카드만 작성하라고 하고 몇 가지 검사만 하고 바로 처방전 내줄 겁니다. 한시가 급해요. 어서요.

약 처방받으시고도 병원에는 계속 다니셔야 해요. 수치스럽게 받아들이지 마시고 이거 꼭 경찰에 신고하셔야 합니다. 성폭력 부서에 가셔서 상담받으셔야 하고요. 관계가 처음이셨나 보네요. 안에 상처가 많이 났어요. 치료해야 합니다. 그대로 두면 염증 나서 암으로 전이될 가망성이 커집니다.

밑에 부분을 전부 까서 훌러덩 벗고 누운 것도 쪽팔려서 낯짝을 바로 들기 힘들었다. 한데 그것도 모자라서 남자랑 그 짓을 몰래 하다 걸린 것같이 모든 치부를 다 의사 앞에서 낱낱이 고하고 몸이 어떤 상태인지 말해주어야 할 상황이었다. 의사는 꼬치꼬치 다 캐물었다. 그러니까 술을 먹고 정신이 몽롱한 채로 있는데 남자가 와서 엉덩이를 만지고 뒤로 했다는 거죠. 어떻게 하다 이 지경까지 됐지. 정말 창피해서 죽고 싶었다. 병원 건물 옥상이라도 올라가 뛰어내리고 싶었다. 자살 충동이 밀려왔다. 네가 당한 일이 아니라는 거지. 아무렇지 않다,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산부인과 여의사의 목이라도 조르고 싶었다. 본인이 당해봤다면 저런 말투로 환자를 대할까. 그리고 그 일이 생기고 처음 본 여자지만 이런 수치심을 느끼게 여기로 안내한 약사가 더 미웠다.

가 내렸다. 빗줄기가 가느다랗게 얇았다. 처음부터 자리를 잘 잡았다. 대형 음식물쓰레기통이 여러 개 몰려있는 방호벽으로 은신하기에는 최적이었다. 냄새는 좀 심했지만,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몸 가리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다. 몇 번 허탕을 치기는 해도, 학교 도로변으로 유흥 점들이 밀집한 곳에 이만한 장소를 꼽기는 힘들다. 내가 당했던 자리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나는 그를 찾아 철저하게 응징하리라 맘먹었다. 그를 찾아내서 꼭 내 손으로 처참하게 해주고 싶었다. 어떻게 만들어 줄까. 그 자식을. 내 앞에 그가 뒤로 손이 묶인 채 서 있는 상상을 여러 번 해봤다. 편의점에서 미리 사둔 날카로운 과도로 그의 복부를 여러 차례 찔렀다. 그는 바로 쓰러지고 옆으로는 피가 낭자하게 땅바닥이 온통 빨간 혈흔으로 물들었다.

조금 전 내가 싸질러 놓은 아래서 더운 피비린내가 났다. 냄새가 역겨워 입을 틀어막았다. 붉다 못해 시커먼 색깔의 혈흔들이 떠다녔다. 나는 한참을 그 혈흔들을 바라보다가 배를 움켜쥐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양이 이상하게 다른 날보다 많네. 변기 레버를 눌렀다. 피와 섞인 물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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