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이야기가 다는 아니지.- 그래도 읽어 볼만은 할까.
그는 여전히 떠벌였다. 학습 중에 정치 외교와는 약간 다른 철학적 향내가 물씬 풍기는 내용에 그는 열변을 토해냈다. 어쩌면 저렇게 열정적일까. 아름다워. 그리고 너무 잘생겼어.
과연 정당의 정책 능력은 미미할 뿐이고, 외교정책은 여전히 권위주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의 철학과 신념이 독과점적으로 지배하는 비원秘苑인가? 정당들은 그저 대통령의 주도권에 순응하며 단순히 거수기 역할만을 하는 것인가? 20년에 걸친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외교정책에서는 여전히 정당이나 국회에 의한 민주적 통제는 진전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정치 외교와 철학과의 상관관계를 유추해 내기보다는 그를 향한 번잡하고 인내하는 나 자신에게 골몰했다. 나서서 아무 말이라도 건네 보던가. 고백하던가. 마음만 조급해졌다. 그에게 홀리고 점점 더 빠져들었다. 공부보다는 그를 보러 가기 위해 참여하는 쪽이 더 많았다.
스터디그룹이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하는 때를 맞이했는데, 중간고사가 끝나고 학교 축제가 이어지는 오월이었다. 축제 기간이 내 마음을 그에게 피력할 수 있는 더 없는 좋은 때라 기회를 엿봤다.
축제 기간에 못 마시는 술을 과감히 마셨고 다른 학과 남학생과 어울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었다. 정작 축제 기간에 그를 볼 수 없어 마음은 이래저래 들떠 다니고 흔들렸다. 이 학교 축제 기간에도 그는 도서관에 앉아 공부하는 건가.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행여 하는 마음으로 축제 마지막 날 그가 나타나면 꼭 고백하리라 맘먹고 단단히 준비하던 차였다. 평소에도 입지 않은 파란 속이 비치는 윗도리에다 최대한 짧은 치마로 한껏 멋을 부렸다.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좀 짜증이 났고 약간의 조율이 밀려왔다. 냅다 술만 마셨다. 마지막 날 축제라 더 분위기가 올랐는지 모두 한껏 달아오른 모습들이었다. 자리에 없는 그를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많은 술을 들이켰다. 야. 웬일이냐. 매번 거부하던 네가 돌아다니면서까지 술을 권하고. 요즈음 뭐 힘든 일 있냐. 요즈음 언니가 아주 힘들다. 누군데. 말해봐. 눈치는 빨라. 아무리 친하게 같이 다니고 스터디를 같이하던 연희라 해도 대 놓고 말하기에는 거북했다. 속내를 드러내기에는 꺼려졌다. 맥주와 소주를 같이 희석해서 먹다 보니 금방 취기가 올라왔다. 나는 그녀 팔에 매달리는 형국이었다. 그러길래. 이렇게 약하면서. 너 혼자 술은 다 마셨구나. 연희는 나를 부축해 동기들과 같이 학교 밖 주점까지 나왔다. 새벽까지 술자리는 이어졌다.
그때 처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나마 같이 있던 연희도 다른 이들과 술을 마시러 갔는지 없어졌다. 아무도 없는 난잡한 쓰레기장을 연상시키는 거리에 홀로 어느 유흥주점가게 앞에서 잠이 들었던 거 같다.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다 보니 내가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주위에 없었고, 엉뚱하게 다른 학과 학생들과 어울려 비몽사몽이었다.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가 힘들었다. 잠이 쏟아지더니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였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희미했다. 그 정도면 집으로 가라거나 숙박업소로 들어가라 챙기는 이가 있을 터인데. 서로 모르는 얼굴과 섞여 취해있는데 길가에 쪼그려 걸터앉아 자는 여자를 누군들 일부러 깨울까. 내 판 내버려 두지. 모르겠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서서히 내 몸을 만져오는 낌새가 집요했다. 능숙해서 세포가 하나하나 깨어나 일어서는 것 같았다. 그 손길은 너무나 부드러워 맹목적으로 몸이 저절로 순종하는 쪽이었다. 달랑 말랑, 애를 태웠다. 혹시 그가 아닌가. 고명수라면 다 오픈해도 창피하지 않을 것 같았다. 되레 기분이 좋았을까. 이대로라면 애틋하여 잡아 끌어들일 판국이었다. 축제 마지막 날인데도 나타나지 않던 그가 아니던가. 이제 사 나타난 거야. 그렇게 애를 태우더니. 안기고 싶었다. 내키는 대로 맡기고 싶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술기운이 아직 한창이었던 것이 큰 원인이었다. 이제는 손이 노골적으로 브래지어를 헤집고 다니며 내 가슴을 맨살로 더듬었다. 내 몸이 점점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까지도 눈을 뜨지 않았다. 떠지지 않았다. 아직도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다. 그러다 내 치마 안 속옷이 내려가고 남자 성기가 엉덩이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느껴져서야 그렇게 떠지지 않던 눈이 번쩍 뜨였다. 나의 순결을 이렇게까지 비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던 그라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거리에서 난리를 치르는 것은 싫었다. 정말 그일까. 나를 범하는 남자가 그가 맞는지 확인하려 급히 고개를 돌려 보려 했지만, 뒤에서 남자의 억센 손에 의해 저지당했다. 어처구니없었다. 느닷없는 눈물이 갑자기 앞을 가렸다. 내 몸 안에 들어온 가느다란 그 딱딱한 것이 찔러대니 너무 아팠다.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려는 참이었는데 또 다른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수초 간이었다. 몸 안쪽에서 따뜻한 뭔가가 싸질러진 것이 복강으로 쓱 올라왔다. 이내 그 딱딱한 것이 몇 번 더 움직이다 떠는 것 같더니 빠져나갔고, 그는 그제야 날 내려놓았다. 쓰러져 있는데 옆으로 눈물이 씌워진 미영으로 그가 바지춤을 챙기는 것이 보였다. 그는 검정 셔츠 차림에 금색 목걸이를 찼다. 좀 전 남자가 내 몸 뒤에서 힘차게 방아질로 가눌 때 쩔렁쩔렁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은 고개를 숙인 채라 어두웠다. 확인할 수 없었다. 그는 획 돌아섰다. 저만큼 멀어져 갔다. 부르려고 해도 목이 그대로 잠겨 도저히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야 이. 미친 새끼야. 그냥 가면 어떻게 하니. 불러 세워야 하는데. 말이 입속에 잠겨 안에서만 돌았다. 그사이에 그는 사라졌다. 연기처럼.
누워있다 일어나 앉아 내 몰골을 바라봤다. 팬티가 다리 한쪽에 걸쳐있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윗단 시스루는 찢겨 브라만 남아있는 꼴이었다.
갑자기 술집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처참했다. 성폭행으로 고소해야 하나. 경찰에서 그 남자 새끼를 잡아들이면 제대로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 줄까.